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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무대 위 황정민 탓에 억장이 무너졌다, 연극 '오이디푸스'

등록 2019.01.30 15:34:42수정 2019.01.30 21:5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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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오이디푸스' ⓒ샘컴퍼니

연극 '오이디푸스' ⓒ샘컴퍼니

【서울=뉴시스】 이재훈 기자 = '오이디푸스'는 두려워하면서도 진실 앞으로 나아간다. 저주의 신탁을 피해 도망쳤건만, '발이 퉁퉁 부은 자'란 뜻의 이름을 지닌 오이디푸스의 발목은 숙명에 붙잡힌다. 

영화배우 황정민(49) 버전 연극 '오이디푸스'는 현대판 로드무비였다. 29일 개막한 이 작품에서 슬픈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달리고 달리는 황정민의 오이디푸스는 '자신을 대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남들을 대면하느냐'며 그 운명 속으로 뛰어든다.

지난해 10년 만에 출연한 연극 '리차드 3세'로 '무대는 배우의 예술'임을 증명한 황정민은 1년 만에 돌아온 무대에서, 연기력의 가속 페달을 밟았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혼인해 그 사이에서 자식을 낳을 것이라는 신탁을 받아 버려지는 오이디푸스 이야기다. 황정민은 아무리 벗어나려 애써도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비극적인 운명을 타고난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를 맡아, 삶의 아이러니를 관객 앞에서 발가벗긴다.
 
아무리 고전은 계속된다지만 또 닳고 닳은 오이디푸스라니, 볼거리가 많은 시대에 낡고 진부하지 않은가. 하지만 황정민 오이디푸스는 이런 편견이 오히려 더 빤하다는 것을 뜨겁게 깨트린다.

황정민은 이 시대 오이디푸스를 낳았다. 그의 오이디푸스가 너무 현실적이라, 하마터면 무대 위로 기어 올라갈 뻔했다. 황정민의 오이디푸스는 너무 뜨거웠고, 그래서 더 안타까웠다. 부친을 죽인 사실을 알고 자신의 눈앞에 있는 부인이 어머니인 사실을 알 때, 분노·슬픔·두려움·죄책감 등이 한껏 뒤섞인 그 무엇을 목구멍 넘기는 그의 연기에 억장이 무너졌다.
연극 '오이디푸스' ⓒ샘컴퍼니

연극 '오이디푸스' ⓒ샘컴퍼니

황정민과 그의 부인이자 연극을 제작한 샘컴퍼니의 프로듀서인 김미혜 대표, 그리고 대표적인 부부 연극계 콤비인 서재형 연출과 한아름 작가의 조합은 이제 연극계의 한 축을 형성하는 사단으로 봐도 무방할 듯하다.

은유로 넘치는 '리차드 3세'라는 고전을 현대로 바싹 당겨왔던 이 조합은 이번에도 그 어려운 걸 또 해낸다. 감각적인 것으로 유명한 서 연출의 무대와 각종 미장센은 현대적인 오이디푸스를 위한 날개다.

서 연출은 과거에 오이디푸스를 음악극으로 옮긴 '더 코러스: 오이디푸스'로 호평을 들었던 '오이디푸스 장인'이다. 충무로에서 떠오르는 배우로 성장한 박해수를 주역으로 내세웠던 '더 코러스: 오이디푸스'는 고전의 숙명인 클리셰를 코러스라는 장치로 현명하게 돌파했었다.

코러스를 이끄는 장(長)과 코러스들이 끊임없이 움직이며 극을 이끌어갔다. 이번에도 오이디푸스의 신탁을 예언하는 역으로 소리꾼 정은혜가 맡은 테레시아스 주변에 배치한 코러스들을 통해 그로테스크함을 줬고, 이전보다 좀 더 연기에 비중을 싣는 방식으로 자기 복제를 탈피했다.

역시 '리차드 3세' 때 호흡을 맞췄던 정승호 무대디자이너와 함께 공연장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깊숙한 뒤편 공간과 유연한 무대 구조를 잘 활용하며, 무대에도 캐릭터를 부여했다. 한 작가는 일반적인 서사 구조를 택하는 대신 과거 일을 회상하는 장면을 중간에 임팩트 있게 담아 미스터리풍의 구조도 살려냈다.

황정민을 든든히 지원한 다른 배우들에게도 마땅히 공을 돌려야 한다. 특히 황정민의 어머니이자 부인인 왕비 이오카스테 역을 연기한 배해선이 발군이다. 그녀는 '오이디푸스'에서 파생한 작품인 '그을린 사랑'에서 이오카스테를 투영한 '나왈'의 중년 시기를 연기, 비극을 온몸으로 승화시켰던 배우다. 평단의 호평을 들었던 '그을린 사랑'에서 배해선이 연기한 나왈을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이번 이오카스테가 더 절실했으리라.
연극 '오이디푸스' ⓒ샘컴퍼니

연극 '오이디푸스' ⓒ샘컴퍼니

'리차드 3세'에서 왕비 '마가렛' 역에 이어 이번 테레시아스로 존재감을 다시 뚜렷하게 한 정은혜는 이 사단의 또 다른 핵심 배우다. 이오카스테의 남동생이자 오이디푸스의 삼촌인 크레온 역의 최수형, 코러스 장 역의 박은석은 뮤지컬 기반의 배우들인데 연극에서도 안정된 연기력을 선보이다. 오이디푸스에게 진실을 전하는 코린토스 역의 남명렬은 연륜에서 묻어나는 무게감으로 극의 중심을 잡는다. 배우들은 모두 요즘 공연계에 일반화된 멀티 캐스팅이 아닌, 원캐스팅으로 연극에 전력한다.

진실을 대면한 오이디푸스는 결국 봐야할 것을 못 본 죄책감으로 두 눈을 찔러 스스로에게 가장 무거운 형벌을 내린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는 현실이 된다. '아침에 네 발로, 점심에 두 발로, 그리고 저녁에 세 발로 걷는 존재'는 바로 인간. 오이디푸스는 지팡이를 들고 세 발로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결국 황정민·서재형 사단이 구축한 오이디푸스 세계는 '과연 진실을 대면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수렴된다. 황정민의 오이디푸스가 꽉 찬 객석으로 내려가 느리지만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그 걸음이 대답이다. 관객들의 가슴은 무너져 내리지만, 위로를 동시에 받는다. 공연은 2월24일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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