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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생각]4차 산업혁명 시대, 혁신의 길을 묻는다

등록 2019.02.01 10:43:05수정 2019.02.01 14:3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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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이선화 국회미래연구원 연구위원. (사진=국회미래연구원 제공)

【서울=뉴시스】이선화 국회미래연구원 연구위원. (사진=국회미래연구원 제공)

【서울=뉴시스】2016년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국은 기계에 대한 두려움을 SF영화에서 현실세계로 끌고 온 이정표적 사건으로 남아 있다. 이 9단은 제4국에서 거둔 승리로 알파고에 패배를 안겨준 유일한 인류로 기록됐으며 한동안 신드롬과 같은 인기를 얻기도 했다. 그러나 일반 가정의 식탁을 더 오래 지배한 것은 내 직종은 AI의 위협에서 안전한가, 내 아이의 미래를 보장할 인간 고유의 기술은 무엇일까하는 전망과 우려였다. 그로부터 2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간 동안 알파고는 인간 지식의 축적물에 기대지 않은 자기학습버전 '알파고제로'로, 다시 범용버전 '알파제로'로 진화해 갔다. 회계사, 세무사로부터 판사, 기자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식서비스 업종이 AI에 의해 대체되리라는 전망이 나오면서 일자리 문제에 대한 위기의식도 팽배해졌다. 제4차 산업혁명으로 통칭되는 기술로 이뤄진 미래 생산현장에 인간을 위한 자리는 보이지 않는 듯하다.

알파고 만큼의 드라마틱한 순간은 없었으나 공유플랫폼 비즈니스는 이미 현실 경제로 파고 들어 기존 제도와 갈등을 빚고 있다. 우버택시로부터 카카오 카풀까지 혁신과 소비자편익을 내세운 플랫폼 비즈니스가 택시산업이 담당하던 운송서비스 분야로의 진입을 시도했다. 생존권을 내건 택시기사 두 분의 안타까운 죽음이 이어졌으나 해법을 찾기 위한 업계와 정부의 노력은 공전을 거듭하고 있다. 앞으로 기술혁신과 사회제도의 관계는 어떻게 재정의될 것인가? 인간이 만들어낸 기술이 통제 불가능한 괴물이 되고 사회적 갈등이 극단으로 치닫는 디스토피아는 어떻게 피해갈 수 있을 것인가?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 새로운 승리자가 된 기술이나 산업은 패배자의 희생을 딛고 기존 제도 또는 사회질서를 대체하게 된다. 전통기술의 폐기는 곧 그 산업에 속한 인간이 생산과정에서 배제됨을 의미하며 경제시스템에서 쓸모가 없어짐을 의미했다. 자본주의 체제의 냉혹함이자 '성공의 비결'이기도 하다. 한국경제를 돌이켜 보면 1960년대 이후 개발사에서 우리는 경제기획원으로 대표되는 파워엘리트의 일사불란한 진두지휘 하에 위기시마다 산업구조 재편을 통해 성장신화를 만들어냈다. 지금까지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농업에서 방직과 신발공장으로, 다시 반도체와 자동차, 조선업으로 주력산업이 이동하는 동안 새로운 산업은 사양산업의 인력을 흡수해 줬다. 극소수로 부가 집중됐으나 다수는 그 이득의 일부를 나눠 가졌다. '운이 좋지 않은' 나머지 소수의 희생이 따른 점은 애석하지만 불가피한 과정으로 여겨졌다. 이 모든 요소가 대한민국의 '성공의 비결'이었던 셈이다.

2019년 당면한 문제로 돌아와 보자. 디지털 기술에 기반한 공유경제라는 거대한 흐름 앞에서 택시산업의 미래는 그리 밝지 않아 보인다. 우선 소비자편익과 기술경쟁력 문제를 외면하면서 호흡기에 의지해 전통적 생산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지속가능하지 않음은 자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경제발전 초기와 같이 소수의 일방적 희생으로 일궈낸 산업재편 역시 더 이상 해답이 되기는 어렵다. 이유를 꼽자면 첫째, 기존산업을 대체해 인력을 흡수할 새로운 대안이 마땅치 않다. 기계에 의한 노동 대체는 택시산업의 문제만도 아니기에 더더욱 그러하다. 둘째, 우리 공동체가 공유하는 기본권의 개념이 확장됨에 따라 다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를 희생하거나 정글로 내모는 정책의 수용성이 낮아졌다. 우리 모두는 신기술이 출현할 때 운 좋게 이에 탑승하는 소수가 되기를 원하지만 AI의 범용성이 높아질수록 그 행운에 올라탈 가능성이 급격히 낮아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글 자본주의로 돌아가기를 거부한다면 기술발전으로 야기될 수 있는 디스토피아를 피할 근본적 솔루션은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수용하는 데 따른 사적 비용의 일부를 사회화하는 것이 아닐까한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경우 선악구도가 선명한 거대 정치현안에 대해 광장에서의 합의를 평화적으로 이끌어 내는 데 대한 경험치는 높으나 미시정치 즉 생활공간에서의 갈등을 협상과 양보를 통해 극복해 나가는 데에 대한 경험은 극히 낮은 것이 현실이다. 최근에만 해도 대화를 위해 제안된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 택시·카풀 사회적 대타협기구가 연이어 삐걱대고 있으며 대화와 타협에 기초한 사회통합은 출발부터 가시밭길이 예견되고 있다. 노·사·정이든지 서로 다른 업종 간이든지 우리 사회에서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집단들이 보여온 그간의 배타성과 전투성을 생각한다면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이러한 비타협적 태도는 이해가 상충될 수 있는 현안에 대해 신뢰를 바탕으로 공동체의 운명을 함께 결정한 경험이 전무한 데 따른 결과가 아닐까 한다. 민주주의가 발전되면서 우리는 과거 정치권이나 엘리트 관료집단의 독점적 권한으로 간주되던 많은 분야에서 자기결정권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막상 기술혁신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이며 그에 따른 열매와 희생을 어떻게 나눠야 하는지와 같은 방정식이 던져졌을 때 이를 푸는 데는 아직 익숙하지 못한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진부하지만 모범답안으로 꼽히는 스웨덴의 사례에 다시 한번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1938년 살트셰바덴에서 이루어진 스웨덴의 노사정 대타협은 자유주의자와 공산주의자, 보수당과 농민당 등이 이끄는 극단적 이념대립이 사회를 원심력으로 갈라놓던 환경 하에서 성취된 것이다. 대타협을 이끈 비그포르스 재무장관의 탁견과 리더십을 제외하면 21세기의 대한민국에 비해 하등 나을 것이 없는 조건이다. 이해가 대립되는 사안에 대해 상호간에 양보하면서 효율성 증대라는 공동이익을 추구했던 전통과 경험은 이후에도 스웨덴의 사회경제체제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토양이 됐다. 스웨덴의 갈등해결 모델은 경영위기로 인한 구조조정 뿐만 아니라 4차 산업혁명 기술에 의한 노동 대체문제에도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범용성을 가지고 있다.

단언컨대 4차산업혁명의 시대에 혁신과 성장을 이루기 위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구글이나 우버, 알파고나 알렉사가 아니라 스웨덴이나 독일이 보유한 '원천기술', 즉 이해갈등의 상황에서 사회적 타협에 도달하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이 능력은 신뢰나 양보와 같은 사회적 자본의 산물이며 기술의 수용과 확산을 원활하게 하는 제도적 기반을 제공한다. 두려워 해야 할 대상은 기계 자체가 아니라 이를 이용하는 사회 시스템이라는 스티븐 호킹의 경고는 대화와 타협에 미숙한 2019년 한국사회에 유달리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이선화 국회미래연구원 연구위원([email protected])
동반성장위원회 공익위원
캘리포니아대학교 데이비스캠퍼스 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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