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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종 문화소통]훈민정음 ㄴ→ㄷ 가획 진실, 게리 교수에 속지말라

등록 2019.02.19 07:01:00수정 2019.02.25 10:3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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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훈민정음 ‘ㄷ’ 글꼴의 가획 과정. ‘ㄴ→ㄷ’의 가획 시 隱(은)의 고자 ‘L’에 ─을 더한 ‘ㄷ(혜)’를 참고하였음.

<사진> 훈민정음 ‘ㄷ’ 글꼴의 가획 과정. ‘ㄴ→ㄷ’의 가획 시 隱(은)의 고자 ‘L’에 ─을 더한 ‘ㄷ(혜)’를 참고하였음.

【서울=뉴시스】 박대종의 ‘문화소통’

세종 시기엔 국가 정책적으로 ‘고전(대전+소전) 학습’이 크게 장려되었다. 훈민정음 창제 14년 전인 세종 12년(1430) 음력 3월 18일, 상정소(詳定所)에서 문자학 관련 인재 등용 시 대전·소전·팔분을 시험 과목으로 할 것을 아뢰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440년 음력 1월 10일 의정부에서 “교서관의 자학(字學)을 권면하고 장려하는 데 미진한 조건을 다시 더 마련하여 아룁니다. 지금부터 일찍이 본관에서 전자(篆字)를 배워서 익힌 3품 이하 6품 이상인 자를, 성균관에서 종학박사를 겸임하는 데에 의하여··· 본조와 그 학(學)의 제조가 시험해 뽑되, 먼저 대전을 쓰고 다음에 소전을 쓰며, 그 다음엔 인전(印篆)과 팔분을 쓰게 하여, 3등급으로 나누어 시행토록 하겠습니다.”라 하였듯 이때는 고전에 능통한 이들이 많았다.

이 같은 상황은 세종으로 하여금 왕으로서 자신부터 고전을 심도 있게 공부하고 연구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나아가 그러한 연구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글자 체계로 인정받고 있는 훈민정음 창제의 원동력이 된다.

그러나 연산군의 탄압 이후 훈민정음 해례본이 이 땅에 종적을 감춘 채 오랜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훈민정음 28자와 관련된 고전 지식 또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갔다. 그렇게 우리가 실생활에서 공기처럼 마음껏 쓰면서도 훈민정음의 자원(字源)에 대해서는 무심한 동안, 미국 컬럼비아대의 게리 레드야드 교수가 예리하게 그 기원을 파고들었다. 

<사진>에서 보듯, 훈민정음 ‘ㄷ’자는 ‘ㄴ’에서 가획한 자형이다. 그런데 세종께서는 가획 시에 B형처럼 하지 않고 A형을 ‘ㄷ’의 바른 모양으로 정했다. 훈민정음 ‘ㅅ’자를 보면 두 선의 끝부분이 삐져나옴 없이 정확히 접점을 이루는데, ‘ㄷ’자는 그와 달리 위쪽 가로선 끝이 ㄴ과의 접점을 넘어서 왼쪽으로 조금 삐져나온 형태다.

소전과 대전에는 어두웠던 게리 교수는 ‘한글의 기원에 관한 연구’에서 훈민정음 ‘ㄷ’ 글꼴의 왼쪽 위 접점에서 돌출된 부분을 파스파 문자 ꡊ(90도 우회전시켜 볼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간주했다. 그는 그 부분을 ‘작은 입술(small lip)’이라고 부르며, “이 입술은 파스파 ꡊ의 자형을 복제한 것이며, 그것은 다시 티벳 글자 ‘ད[d]’으로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해례본을 완전 무시한데서 비롯된 심대한 착각이자 오판이다.

<사진>에서처럼, ㄷ자는 발음 시 혀끝이 윗잇몸에 붙는 모양을 상형한 혓소리 ‘ㄴ’에 가로선(一)을 가획한 것이다. 이는 훈민정음 해례본에 명기된 주지의 사실(fact)이다. 하지만 파스파문자 ꡊ은 ㄴ(n) 음가의 ꡋ과는 자형 상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 즉, ‘ㄴ→ㄷ’처럼 ꡋ(n)에서 가획되어 ꡊ(d)의 글꼴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므로 게리의 주장에 속지 말아야 한다.

영명하신 세종께서는 n의 음가에 해당하는 혓소리를 관찰 끝에, 혀가 구부러지는 모양을 고려하고 그걸 방정하게 다듬어 ‘ㄴ’의 자형을 새로이 만든다. 그 놀라운 제작과정에서 ‘隱(숨길 은)’의 고자 ‘L’이 자신이 창제한 ‘ㄴ’자와 글자꼴이 서로 같음을 인지한다. 그래서 ㄴ에서 가획하여 ㄷ자를 만들 때, 비록 ‘혀’와는 상관없고 최만리 상소문처럼 용음(用音)은 다를지라도 그 자형은 ‘L(은)’에 一을 가획한 ‘ㄷ(감출 혜)’의 소전체를 참고하였을 것이다.

‘ㄷ(혜)’에서 위쪽 가로선은 ‘덮개, 덮다’를 의미하며, ‘ㄷ(혜)’는 위에 덮개(一) 따위를 덮어서 감추고 숨기는(L) 모습을 형용한 글자이다. 병뚜껑이나 항아리 뚜껑, 옛날 가마솥 뚜껑은 모두 본체보다 뚜껑이 더 크다. 그래서 밖으로 삐져나오게 돼있다. 세종께서 ㄴ→ㄷ 가획 시 ‘L(은)→ㄷ(혜)’의 가획 과정을 참고하지 않았다면 훈민정음 ‘ㅅ’처럼 두 선 만나는 부분을 삐져나옴 없이 정확히 맞추었겠지만, 삐져나오게 글꼴을 확정했으니 그것은 ‘ㄷ(혜)’의 고전을 참고했다는 증거이다.

대종언어연구소 소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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