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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소프라노 임선혜, 9m에 매달리고 1000ℓ 수조 들어가다

등록 2019.02.20 19:2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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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토리오 '천지창조'

임선혜 ⓒPRM

임선혜 ⓒPRM

【서울=뉴시스】 이재훈 기자 = "고소공포증이 있습니까?", "잠수가 가능합니까?"

액션현장을 누비는 스턴트우먼이 받은 e-메일 내용이 아니다. 세계 오페라 하우스를 우아하게 누비는 '아시아의 종달새' 소프라노 임선혜(43)가 한 프로덕션의 리허설이 시작되기 몇 달 전 받은 e-메일의 기괴한 질문들.

임선혜는 20일 "싱어가 받기에는 다소 황당한 질문들이었어요. 이걸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할 지 몰라서 처음에는 웃음이 났죠"라며 미소 지었다.

임선혜는 바로 이런 답을 보냈다. '고소공포증은 없지만 얼마나 높은 곳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무엇을 하면서 노래해야하는지가 관건이다. 물에 들어가는 건 상관없지만 물에서 나온 후 젖은 몸과 머리로 노래해야하는 건 감기 등의 위험부담이 있다'고. 

소프라노에게 이런 위험천만한 주문을 한 작품은 스페인의 비주얼 아트그룹 '라 푸라 델스 바우스'. 이 공연단체가 제작한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는 성악가가 거대한 크레인을 사용하는 와이어에 매달려야 하고, 1000ℓ가 넘는 수조 속에 빠져야 한다.
[인터뷰]소프라노 임선혜, 9m에 매달리고 1000ℓ 수조 들어가다

크레인은 배우를 그리스 비극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 즉 라틴어로 '기계 장치의 신'이라는 뜻으로 초자연적인 힘을 이용해 긴박한 국면을 타개하는 역을 하고 1000ℓ 물이 담긴 수조는 무대의 균형추를 하는 동시에 빛을 포착하면서 생명의 창조를 위한 거대한 실험 튜브, 즉 자궁 역을 한다.

'고음악 디바'로 한정짓기에는 여러 프로젝트에 열려 있는 임선혜는 "저는 새로운 일에 흥미를 갖고, 심지어 재밌어하는 사람이에요. '연출력으로 저를 설득시켜달라. 그러면 최대한 콘셉트에 부합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죠"라고 전했다.

2017년 프랑스에서 초연한 '천지창조'는 필하모니 드 파리, 독일 엘프필하모니홀, 타이완 가오슝 아트센터 등 최근 개관한 세계 유명 극장의 오프닝을 장식했다. 지난해 말 개관한 '아트센터 인천'(ACI)이 올해 시즌 개막공연으로 3월 1, 2일 선보인다. 한국에서 이 작품이 공연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임선혜는 2017년 6월 엘프필하모니홀 오프닝 공연에 참여했다.

라 푸라 델스 바우스는 스페인 카탈루냐 지역에서 '스트리트 시어터', 즉 거리극으로 출발한 공연 단체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개막식을 연출한, '천재형의 괴짜'들이 모인 곳이다. 2011년 내한, 서울거리예술축제(옛 하이서울페스티벌)에서 '레인보 드롭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천지창조' 리허설 ⓒ임선혜 인스타그램

'천지창조' 리허설 ⓒ임선혜 인스타그램 

임선혜는 이번 '천지창조' 프로덕션을 위해 발명해낸 거대한 기계장치와 디지털 테크닉에 압도됐다. "구애 받지 않고 창의성을 발현했거든요. 처음 이 공연을 본 평론가들도 놀랐죠. 선입견을 가지고 보면 덜 놀라고, 감회도 덜할 거예요."

임선혜도 처음에는 조심스러웠고, 의문도 품었다. 같은 배역에 캐스팅된 소프라노와 함께 '웬만하면 수조에 들어가지 않는 것으로 하자'는 암묵적인 약속도 했다. '스캔들을 조장해서 노이즈 마케팅을 하는 프로덕션'에 알레르기를 갖고 있었던 것도 한몫했다. 무엇보다 기술로 '음악적인 가치'가 훼손이 될까 우려스러웠다.

하지만 기우였다. 임선혜는 "라 푸라 델스 바우스의 접근 방법에서 감동했어요. 기계에 몸을 실을 때 불편하지 않는지, 이것으로 구현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유창하지는 않지만 진심을 담아 영어로 설명하는데 거기에서 진정성을 느꼈습니다"라고 했다. 

연출가인 카를루스 파드리사(60)는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다. '우리는 기중기를 통해 배우와 성악가들을 공중으로 들어 올려 중력을 거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주와 공간이 이러한 힘든 것들로 가득 차 있음을 증명하려는 것'이라고. 임선혜는 "세상의 창조를 테크놀로지 발전이 구현할 수 있는 시대가 왔는데 우리의 리얼리티가 무엇인가 고민하게 됐죠"라고 했다.
'천지창조' ⓒclaudia hoehne

'천지창조' ⓒclaudia hoehne

'천지창조'의 가사는 성경 창세기와 시편에 나오는 우주와 생명, 인간의 창조를 이야기한다. 존 밀턴의 ‘실낙원’에서 일부 구절이 인용되기도 했지만, 원죄에 대한 부분은 언급하지 않는다. 대신 원죄는 전쟁 또는 경제적, 자연적, 정치적, 종교적인 이유로 인해 낙원에서 쫓겨난 난민으로 표현된다.

임선혜는 "작품이 난민들을 표현하는 방식을 보면서 그것이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 생각했어요"라면서 "작품을 보면서 혼돈이 깨지고 빅뱅이 시작되면서 폭풍우를 맞고 앞으로 나아가죠. 항해사가 없는 항해를 시작하는 거예요. 그들이 세상을 겉돌고 있는데, 최초의 인간으로 땅에서 환영을 다시 받아요. 그런 부분이 새롭게 느껴졌습니다"라고 했다. 

임선혜는 독일 칼스루에 국립음대에서 유학하던 중 고음악계의 거장 벨기에 지휘자 필립 헤레베헤(71)에게 발탁됐고, 유럽 무대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올해가 유럽 데뷔 20주년을 맞는 해다.

3월 롯데콘서트홀에서 야콥스가 지휘하는 독일 프라이부르크 바로크 오케스트라와 함께 '다 폰테 3부작' 마지막 시리즈인 오페라콘서트 모차르트 '돈 지오반니' 무대에 오르고, 4월 오스트리아 출신 만프레드 호네크 지휘자가 이끄는 이스라엘 필하모닉과 함께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을 연주하는 등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빠듯한 스케줄을 소화해야 한다.
'천지창조' ⓒMarie Guilloux

'천지창조' ⓒMarie Guilloux

이번 '천지창조'에서 사용된 태블릿이 삼성전자 제품인 것을 알고 외국인들이 한국에 관심을 가진 것처럼 임선혜를 접하고 한국 클래식음악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임선혜는 "라 푸라 델스 바우스 팀이 저와 함께 '천지창조'를 한국에도 가져가고 싶다고 했었는데 이 작품을 인천아트센터의 개관 작품으로 한국에 소개할 수 있게 돼 기뻐요"라며 웃었다.

아트센터인천 박지연 공연기획팀장은 "물 사용 등이 민감할 수 있는데 사전에 방수 처리를 하는 등 조치를 취하고 있다. 세계 여러 공연장 조건에 맞춰 사이즈별로 무대가 구현된다"고 전했다.

한편 이번 공연에는 베이스바리톤 토마스 타츨, 테너 로빈 트리췰러가 솔리스트로 나선다. 고음악 전문연주단체 '카메라타 안티콰 서울'과 '그란데 오페라 합창단'이 참여하며, 지휘자 김성진이 함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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