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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년 그날을 기억한다…서울 역사의 현장은?

등록 2019.02.23 1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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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역, 독립운동 테마 역사로 변신

천도교 중앙대교당, 3·1운동의 중추

승동교회, 주역인 학생들의 아지트

탑골공원, 학생·시민들 독립선언식

보신각·유관순기념관·보성사표석도

【서울=뉴시스】독립운동 테마 역사 안국역. ((사진=뉴시스 DB)

【서울=뉴시스】독립운동 테마 역사 안국역. ((사진=뉴시스 DB)

【서울=뉴시스】배민욱 기자 =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3·1운동은 봉건 체제를 민주공화정으로, 왕토를 국토로, 백성을 국민으로 탄생시킨 역사적 혁명이다. 100년이 흐른 지금 서울 도심 곳곳에서 그날의 함성을 느낄 수 있는 역사의 현장들이 많이 있다. 

23일 서울시에 따르면 안국역은 3·1운동의 중심지 북촌과 인사동 등을 잇는 거점이다. 인근에 여운형·손병희 선생 등 독립운동가의 집터가 있다.

이를 기념해 서울시와 서울교통공사는 안국역을 독립운동 테마 역으로 꾸몄다. 안국역 4번 입구에 설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상하이 청사 대문을 표현한 '100년 하늘문'을 비롯해 다양한 조형물과 기념물을 조성했다. 대표적인 것이 독립운동가의 얼굴을 100초 동안 만날 수 있는 그래픽 '100년 기둥'이다.

불꽃처럼 살다 간 독립운동가들이 올해 '100년 기둥'에서 다시 만난 셈이다. 100년 기둥에는 독립운동가 800여명의 사진을 담았다. 한 명 한 명에게서 독립에 대한 의지와 염원을 느낄 수 있다.

지하 4층 승강장에는 안전문과 대기 의자에 독립운동가의 업적과 어록을 기록해 놓았다. 김구, 안중근, 윤봉길, 유관순, 이봉창 등 출근길이나 퇴근길에 차량 칸마다 다른 독립운동가를 만날 수 있다.

대기 의자인 '100년 걸상'은 여덟 가지 주제로 나눠 무명의 독립운동가 이름을 새겨놓았다. 3·1운동과 민족사의 흐름을 강물로 구성한 영상과 그래픽 '100년 강물', 우리 헌법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 '100년 헌법'이 마련돼 있다.

3·1운동 배후에는 종교계의 지원도 있었다. 인사동 삼일대로에 있는 천도교 중앙대교당도 그 중 한 곳이다.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3·1운동 역사의 현장이자 독립운동의 한 부분이다. 당시 천도교는 '척왜(斥倭)'를 외치던 동학의 후신이다. 독립운동에도 매우 열성적이었고 3·1운동 중심에 서 있었다.
【서울=뉴시스】천도교 중앙대교당. (사진=뉴시스 DB)

【서울=뉴시스】천도교 중앙대교당. (사진=뉴시스 DB)

천도교 제3대 교조 손병희 선생은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기 위해 1918년 중앙대교당 설립이라는 명목 아래 성금을 걷었다. 이 중 일부를 중앙대교당 건축에 쓰고 나머지는 3·1운동 자금으로 사용했다. 상하이 임시정부와 독립군 운용 자금으로 보내기도 했다. 보성사에서 인쇄한 독립선언문은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보관했다가 3·1운동 당일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인사동 거리로 접어드는 초입에 100년 넘은 오래된 예배당 승동교회가 있다. 1912년 지은 승동교회는 3·1운동의 주축인 학생단의 모임 장소였다. 학생 모임을 주도한 것은 승동교회에 다니던 김원벽이다.

그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교회 소학교 사무실에서 학생회 모임을 열었다. 학생들은 승동교회에서 3·1운동의 구체적 실천 계획을 논의했다. 일본의 삼엄한 감시를 뚫고 독립선언문을 배포하기도 했다. 3·1운동으로 김원벽을 비롯한 많은 교인이 투옥되자 당시 승동교회 차상진 목사도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12인의 장서'를 과감히 조선총독부에 제출하고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 후 승동교회는 일본 경찰이 압수수색을 하는 등 수난을 겪어야 했다. 1993년 '3·1독립운동 유적지'로 지정된 것을 기념해 교회 마당 한편에 3·1독립운동기념 터 표지석을 세웠다.

종로 탑골공원은 1919년 3월1일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장소다. 민족 대표와 학생 대표는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탑골공원에서 만나 독립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그러나 유혈 사태를 우려한 민족 대표는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했고 아무런 통지를 받지 못한 채 탑골공원에 모여 있던 학생들과 시민들은 탑골공원 내 팔각정에서 오후 2시30분께 자체적으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군중에게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눠줬다.

학생들은 서울에서뿐 아니라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서도 운동을 멈추지 않아 전국적인 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탑골공원에는 3·1운동 벽화, 손병희 선생의 동상 등이 있다. 탑동공원, 파고다공원으로 불리는 탑골공원은 독립운동 성지로서 격에 맞는 대우를 받지 못하다가 2002년 삼일절에 성역화 작업을 거쳐 재개장했다.
【서울=뉴시스】승동교회. (사진=뉴시스 DB)

【서울=뉴시스】승동교회. (사진=뉴시스 DB)

보신각도 빼놓을 수 없다. 탑골공원에서 독립을 외친 군중은 보신각에서 일제에 항의하는 표시로 보신각종을 울렸다. 이후 보신각은 3·1운동의 상징적 구심점이 됐다. 학생단 주도로 제2차 대규모 시위가 열린 3월5일 남대문역 광장에서 여러 갈래로 나뉜 시위대는 낮 12시께 이곳에 모여 독립 연설회를 개최했다. 이후 4월23일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는 국민대회도 이곳에서 열렸다.

1919년 당시 이화여고 학생이던 유관순 열사를 기리는 유관순교실과 유관순기념관도 있다. 이화박물관 안에 있는 유관순교실은 당시의 교실 모습을 재현했다. 유관순 열사와 이화학당 학생의 모습이 영상으로 상영된다.

유관순기념관은 수의를 입은 열사 사진을 비롯해 일제강점기의 참상을 담은 사진과 열사가 남긴 유물 등이 전시돼 있다. 기념관 근처에는 열사의 동상과 열사가 빨래를 했다는 유관순 우물 터가 있다. 아쉽게도 유관순기념관은 일반인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화박물관은 일요일, 월요일, 법정 공휴일을 제외하고 언제든지 관람할 수 있다.

조계사 후문 맞은편에 있는 수송공원에서도 독립운동의 열기를 느낄 수 있다. 3·1운동 당시 '조선독립선언서' 3만5000장을 인쇄한 최초의 근대식 인쇄소 보성사 터가 있다. 인쇄물 운반 중 일본 형사에게 발각될 뻔하기도 했으나 족보로 위장해 위기를 넘겼다.

3월1일에는 지하 신문 '조선독립신문' 1만부도 발행했다. 이후에도 일본의 눈을 피해 계속 조선독립신문을 찍어서 배포했으나 결국 발각돼 폐간됐다. 보성사도 1919년 6월28일 밤 일본인에 의해 불태워졌다. 현재 보성사 터에는 6.35m 높이의 '3인의 군상과 민족정기'라는 조형물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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