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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백년과 여성]②권기옥은 누구…1925년 한국인 최초 여자 비행사

등록 2019.02.23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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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갈례’로 불려…또 딸이니 '어서 가라' 뜻

늦게 입학해 학교서 이름 찾아…세례명은 에스더

초대 '딩크족’…남편 이상정과 평등한 관계도 주목

"소녀·어머니 운동가 이미지 넘어선 진취적 여성"

【서울=뉴시스】권기옥 선생. 2019.02.22 (제공=권기옥 유족 권현 광복회 이사장)

【서울=뉴시스】권기옥 선생. 2019.02.22 (제공=권기옥 유족 권현 광복회 이사장)

【서울=뉴시스】조인우 기자·윤해리 수습기자 = 갈례에서 기옥(基玉), 그리고 에스더로. 권기옥(1901~1988)의 생은 조국의 독립 뿐 아니라 그녀 자신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이름을 찾아가던 삶으로 기록된다.

1901년 평양에서 태어난 권기옥은 어린 시절 집에서 '갈례'로 불렸다. 끝순이나 말년 류의, 지독한 남아선호사상을 증명하는 이름이다. 손 위 언니에 이어 또 딸이 태어났으니 '어서 가라’는 뜻에서, 아버지는 권기옥을 갈례로 불렀다.

집은 가난했다. 그 때 일본이 병참기지화 전략을 쓰면서 권기옥이 살던 평양에 군수물자 공장이 들어섰다. 식민지 조선 가난한 집의 둘째 딸이라면 응당 그렇듯, 권기옥은 11살이던 1912년부터 은단공장에 취직해 생계 전선에 뛰어들었다.

기옥이라는 이름을 찾은 것은 이듬해 장대현교회에서 운영하는 숭현소학교에 입학하면서다. 비슷한 시기 권기옥이 스스로 선택한 이름은 에스더(세례명). 유대인의 딸로 페르시아의 왕비가 돼 몰살 위기에 처한 동족을 죽음에서 구하는 인물이다.

소학교 졸업 후 숭의여학교에 편입한 권기옥은 스승 박현숙의 영향을 받아 학내에서 결성된 비밀결사대 송죽회에 가입하고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다. 1919년 3월1일 만세 시위에 동참했다가 감옥 신세를 지기도 했다. 이후 임시정부와 연계해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는 일을 하다 다시 체포돼 6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서울=뉴시스】권기옥과 남편 이상정. 2019.02.22 (제공=권기옥 유족 권현 광복회 이사장)

【서울=뉴시스】권기옥과 남편 이상정. 2019.02.22 (제공=권기옥 유족 권현 광복회 이사장)

독립운동가에게 몰래 권총을 전달하는 등 임시정부에 협력하던 권기옥은 일본 경찰에 덜미를 잡혀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받는다. 수십번 정신을 잃었다 다시 깨어나도 입도 뻥긋 하지 않는 권기옥을 두고 당시 권기옥을 심문한 일본인 형사는 조서에 이렇게 썼다고 전해진다. "이 여자는 지독해서 도무지 말을 않는다. 검찰에서 단단히 다루길 바란다."

1920년에는 독립운동 동지들과 연락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여성전도대를 꾸렸다. 이마저도 일본의 감시로 활동이 어려워지자 같은 해 9월 건멸치배에 숨어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권기옥은 중국에 도착하자마자 긴 머리를 싹둑 자른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단발 여성으로 전해지는 1923년의 어느 기생보다 약 3년 앞선다. 사실상 최초의 단발 여성인 셈이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만난 남편 이상정(1896~1947)과의 결혼생활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당시 권기옥의 나이는 26살, 결혼을 한 1926년 기준으로 이미 늦은 나이다. 남편 이상정의 등을 타고 앉아 찍은 사진이 두 사람의 평등한 부부 관계를 보여준다. 그렇게 아이도 낳지 않고 평생을 살았다. 1968년에야 조카손자였던 권현 광복회 이사를 입양했다. 초대 딩크족인 셈이다.

권기옥 평전소설 '날개옷을 찾아서’를 쓴 저자 정혜주는 "독립운동가 부부 중 여자는 집에서 내조하고, 남자는 바깥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권기옥 부부는 그렇지 않았다"며 "결혼 후 아이를 낳지 말자고 먼저 제안을 한 것 역시 비행사, 군인으로서 자신이 추구해야 할 목표를 우선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고 설명했다.
【서울=뉴시스】1937년 난징에서 만난 권기옥과 남편 이상정(오른쪽 아래), 시동생 이상화(왼쪽 아래) 시인. 2019.02.22 (제공=권기옥 유족 권현 광복회 이사장)

【서울=뉴시스】1937년 난징에서 만난 권기옥과 남편 이상정(오른쪽 아래), 시동생 이상화(왼쪽 아래) 시인. 2019.02.22 (제공=권기옥 유족 권현 광복회 이사장)

권기옥의 삶은 비행사가 돼 일왕(日王)의 머리에 폭탄을 투하 하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한 걸음걸음이었다. 권기옥은 상해에서 홍도여자중학을 졸업한 뒤 꿈꾸던 비행사가 되기 위해 운남육군항공학교에 입학, 1925년 1기생으로 졸업장을 따내며 한국인 최초의 여자 비행사가 됐다.

임시정부의 열악한 상황 탓에 중국 공군에서 비행사로 활약하며 일왕의 궁전에 폭탄을 투하할 그 날을 꿈꿨다. 1935년 일본 도쿄를 종착지로 하는 선전비행 계획이 무산되면서 이 꿈을 접게 됐지만 그 뒤로도 국가를 위한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정 작가는 "누구의 어머니, 누구의 딸, 누구의 아내가 아닌 여성 권기옥 그 자체로 우뚝 섰던 것. 그 자체가 권기옥 선생이 한국 독립운동사에 남긴 의의"라고 했다.

"여성 독립운동가라고 했을 때 떠오르는 대표적인 이미지는 유관순 선생입니다. 앞장서 만세를 부르다 옥에 갇혀 죽은 누나 혹은 언니, 비참한 운명의 여린 소녀 느낌이죠. 또 다른 하나는 임시정부의 안주인 정점화, 어머니 조마리아 등으로 대표되는 가부장적인 이미지예요. 권기옥은 그러나 이 둘을 모두 뛰어넘었습니다. 진취적으로, 제도의 틀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됐죠."

▲참고자료: 정혜주 '날개옷을 찾아서'(2015), 윤선자 '한국독립운동과 권기옥의 비상'(2014), 김영주 '한국최초의 여류비행사 권기옥'(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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