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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환, 언제나 민중의 편에 선 '떠돌이 목자'

등록 2019.03.10 14: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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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환, 언제나 민중의 편에 선 '떠돌이 목자'

【서울=뉴시스】 이재훈 기자 = 98세를 일기로 9일 오후 소천한 문동환(98) 목사는 '떠돌이'를 자처했다.

2009년 펴낸 '문동환 자서전'(삼인)의 부제도 '떠돌이 목자의 노래'다. 고인은 성서에서 하느님이 고향에서 밀려난 떠돌이들을 부르셨다며 "한국에서는 그들을 민중이라고 한다"고 정의했다.

문 목사는 이 자서전에서 "그들 민중 대부분은 아직도 현재의 제도 안에서 어떻게든 살길을 찾으려고 애쓸 뿐이다. 새 역사의 주인공은 현재의 제도에서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떠돌이"이라면서 "이렇게 해서 나는 다시 떠돌이 신학을 추구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일제강점기인 1921년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난 고인은 목회자이자 신학자로서 언제나 민중의 편에 서서 그들의 관점으로 역사 변화의 가능성을 탐색했다.

형인 문익환(1918~1994) 목사와 한국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어왔다. 형이 '통일 운동의 선구자'였다면서 동생인 문 목사는 '민주화 운동의 거목'이었다.

기반에는 '민중신학'이 있다. 기독교 정신과 멀어진 한국 교회를 비판하는 차원을 넘어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을 착취하는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방패였다.

인간이 소외되는 산업시대의 병폐에 크게 주목했던 문 목사는 공동체에 관심을 기울였다. 소유를 넘어 공유하고 사랑을 나누는 공동체를 꿈 꿨다.

신자들이 1주에 한 번씩 교회를 찾는 의례적인 행위를 의심했던 문 목사는 유대감을 중요시하는 공동체 운동을 실천했다. '진보주의 신학자' 김재준(1901~1987) 목사가 이를 보고 '새벽의 집'이라 이름 지었다.

1972년 출발한 이 공동체는 문 목사가 민주화운동으로 수차례 투옥되는 가운데도 8년이나 이어졌다. 파격적인 실험이었다.

문 목사가 민주화 운동으로 반독재에 본격적으로 앞장서기 시작했던 때는 1961년 한신대 교수로 부임한 이후다. 한신대 학생과장으로 이 학교를 '반독재 운동'의 한 축으로 이끌었다.

정부의 탄압으로 해직당한 뒤에도 해직된 교수들과 함께 반독재 운동을 이어갔다. 1975년 4월9일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연루된 여덟 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후 설교에서 이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남산에 있는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조사를 받기도 했다.

2009년 8월19일 뉴욕총영사관에 마련된 김대중 전 대통령 분향소를 찾은 문동환 목사

2009년 8월19일 뉴욕총영사관에 마련된 김대중 전 대통령 분향소를 찾은 문동환 목사

특히 1976년 3월1일 명동성당에서 3·1운동 기념 미사 뒤에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김대중(1924~2009) 전 대통령, 형 문익환 목사 등과 함께 구속 기소돼 서울구치소에 수감됐다. 당시 긴급조치 철폐와 의회정치의 회복을 요구했다.

1978년 새벽의 집은 수감돼 있던 김 전 대통령과 문익환 목사 석방을 위한 투쟁 공간이었다. 문 목사는 농성과 시위, 동일방직 노조 활동 지원 등의 일련의 사태 끝에 1979년 동일방직과 YH 노조원 투쟁을 지원한 혐의로 다시 감옥에 들어갔다.

같은 해 석방돼 한신대에 복직했으나, 신군부의 등장 이후 또 해직됐다. 이후 미국으로 망명했다. 5·18광주민주화운동 등 신군부의 폭정을 알리는 등 현지에서 고국의 민주화를 위해 힘썼다.

1985년 한국에 돌아와 다시 한신대 강단에 섰고 1986년 은퇴했다. 1988년 정치에 발을 들여놓아 김 전 대통령이 총재였던 평화민주당(평민당) 수석부총재를 역임하기도 했다. 국회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도 활동했다. 1992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민중신학 관점으로 성서 연구에 주력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해 갈수록 열악해지는 민중에 대한 관심은 여전했다. 고향을 떠난 이주노동자에 깊은 관심을 드러냈다. 민중신학을 심화시킨 '떠돌이신학'을 통해 열악한 민중들의 삶의 구조를 만들어내는 신자유주의 문제에 대한 인식을 끊임없이 드러내기도 했다.

형 문익환 목사와 함께 통일운동에 힘쓴 공로도 컸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 '6·15남북공동선언실천 해외 위원장'을 맡는 등 통일 운동에도 적극 나섰다. 지난해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10·4선언 11주년 기념 평양 민족통일대회 남측 대표단을 만난 자리에서 “문동환 선생은 소식을 모르나"라고 묻기도 했다.

문 목사는 미국에 살다 2013년 귀국한 뒤 아흔살이 넘는 나이에도 설교 등을 통해 민중, 자본주의 산업 문명의 부조리에 대한 문제의식 등을 드러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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