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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위안부 공부방' 잊혀진 성희롱…피해자는 日여성

등록 2019.03.24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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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단체 회식자리서 성희롱 피해 발생

피해자 고통 세월…"그간 머리카락 안잘라"

"기분 나빴다면 미안? 조건부 사과에 분노"

단체·소속학교 통해 사과받길 원하나 수포

【서울=뉴시스】

【서울=뉴시스】2010년 성희롱을 당한 이후 머리카락을 한 번도 자르지 않은 야마다 유키(가명)씨. 야마다씨는 "분노와 고통의 세월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2019.03.23

◇【서울=뉴시스】조인우 기자 = "이 긴 머리카락은 제 고통의 세월이에요. 제가 얼마나 오래, 얼마나 큰 분노와 고통에 시달렸는지 아무리 말해도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언젠간 이 머리카락으로 꼭 보여주고 싶었어요."

연세대학교의 한 연구소 소속 일본인 전문연구원 야마다 유키(가명)씨는 지난 9년여 간 한 번도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았다.

"그동안 웃는게 웃는게 아니었어요. 계속 눈물이 나와요. 잠에 들면 악몽에 시달리고, 사는게 사는게 아니에요. 이대로 하늘나라에 갈까, 그런 생각도 많이 했어요."

그의 사연은 이렇다.

◇'위안부 역사모임' 회식에서 성희롱 당하다

야마다씨는 2010년 10월29일 성희롱을 당했다. 가해자는 지방의 한 사립대학교 일본학과 A교수다.

두 사람은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에 활발히 목소리를 내는 B단체가 당시 발족한 센터에서 추진한 연구 모임에서 만났다. 야마다씨는 당시 연세대에서 박사 과정을 밟던 중이었다.

사건이 발생한 그 날은 모임 내 친목을 다지기 위한 자리였다고 야마다씨는 기억했다.

연세대 성폭력상담소에 제출한 야마다씨의 진술서에 따르면 사건은 고깃집에서 식사를 마치고 술집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식사자리에서 다소 술에 취한 A교수가 혼자 떨어져 걷던 야마다씨의 옆으로 와 팔짱을 끼라는 듯한 행동을 취했고, 야마다씨가 이에 응하지 않자 일방적으로 손을 잡고 50~100m를 걸어간 것이다.

야마다씨는 진술서에서 "이런 짓을 해도 되냐고 물으며 근처에 있던 사람들에게 도와 달라고 했으나 다들 웃으며 장난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고 적었다.

야마다씨는 "A교수가 내게 '왜 여기에 왔냐', '네가 이 모임에 기여하는 게 도대체 뭐냐'고 해서 이 모임에 나오려면 이런 걸(팔짱을 끼고 손을 잡는 행위를)해야 하냐고 되물었다"며 "불편함을 호소할수록 주변 사람들은 그저 폭소하기만 했다"고 말했다.
【서울=뉴시스】

【서울=뉴시스】2010년 성희롱을 당한 이후 한 번도 자르지 않은 야마다 유키씨의 머리카락. 야마다씨는 "분노와 고통의 세월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2019.03.23

◇"불편했다면 미안" 조건부 사과…피해자는 좌절

추후 이 내용을 전해 들은 B단체의 대표가 모임의 소관 단체 대표로서 중재를 하겠다고 나섰다. 그리고 2011년 2월18일 야마다씨는 A교수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야마다씨에 따르면 A교수는 1분45초 간의 통화에서 "혹시 불편하게 만들었다면 사과한다. 그 자리에서 말했으면 좋았을텐데, 이 전화로 사과를 받아준 것으로 알겠다"고 말했다.

또 이 사건 이후 연구모임에 나가지 않고 있던 야마다씨를 향해 "공부가 중요하지 않느냐. (앞으로는) 꼭 모임에 나오라"고도 했다.

야마다씨는 "성희롱을 당하고도 기분이 나빴지만 전화를 받고 나서는 더 큰 불쾌감과 분노를 느꼈다"며 "그 통화에서 진지하게 사과를 하고 용서를 받으려는 태도,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 같은 말은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제가 학생 신분인 걸 강조하는 억압적인 말투, 현장에서 거부 의사를 표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며 이제야 문제를 제기한다는 식의 비웃음 등을 사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고 덧붙였다.

◇고통의 9년…'진심어린 사과' 결국 없었다

야마다씨의 이후 9년은 2010년의 성희롱, 이듬해 A교수와의 통화 및 이를 고발하는 과정에서 받은 2차 피해와 싸우는 시간이었다.

B단체 내부에서의 해결이 어려울 것으로 보고 사건을 최초 신고한 연세대 성폭력상담소와 이후 사건을 넘겨 받은 A교수 소속 사립대 성윤리위원회는 이 사건을 성희롱으로 판단했다.

다만 지정 기관에서의 가해자 교육 10회 및 모임 내 공개사과라는 야마다씨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아 A교수와의 합의는 계속 불발됐다.

A교수가 속한 사립대에서는 A교수가 원하는 기관에서 가해자 교육 5회를 받은 것으로 위원회의 결정 사항을 이행했다고 보고 2013년 징계를 소멸 처리했다.
【서울=뉴시스】

【서울=뉴시스】야마다 유키씨가 2010년 사건 발생 이후 연세대 성폭력상담소 등 관련 기관과 상담하면서 작성한 진술서 및 사건진행경과 보고서. 2019.03.23

야마다씨는 "뭔가 해보려고 해도 자꾸 제도적으로 막히는 기분이었다. 연세대는 이미 A교수 사립대로 사건을 넘겼고, 해당 사립대는 징계가 소멸돼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했다"고 말했다. 야마다씨는 사립대 총장에게 이같은 호소를 담은 이메일을 보내기도 했으나 아무런 답변을 받지 못했다.

힘들어하던 야마다씨를 보다 못한 야마다씨의 지도교수는 2014년 공개사과 자리를 만들었다. 문제의 모임에 소속됐던 연구위원들을 불러 모았으나 A교수와 B단체 대표만 참석했다.

공개사과 자리의 취지는 '위안부’ 할머니를 지원하고 그 문제를 해결한다고 하면서 한 개인의 고통에 무감하게 대처한 것에 대해 논의해 보자는 것이었다.

A교수와 B단체 대표가 이 자리에서 사과문을 낭독했으나 현장에서는 "이렇게 해서는 공개사과 자리가 의미가 없어진다"는 발언이 오가는 등 사과로 볼 수 없다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 현장은 연세대 성폭력상담소가 영상으로 촬영해 남겼다.

야마다씨는 "당시 죄송하다는 말은 했지만 '기분이 나빴다면’이라는 조건부였다"며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고 반성하면서 용서를 구하는 인식과 태도가 아니었다. 사과는 용서를 구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이는 사과와는 거리가 먼 행위였다"고 주장했다.

또 다시 문제해결에 제자리 걸음을 걷게 된 야마다씨는 2018년 미투 운동의 흐름을 타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이 진행한 관련 범정부 프로젝트에 한 번 더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진흥원 상담원과 함께 공개사과 현장 영상을 보려고 찾은 연세대 성폭력상담소에서 해당 영상이 삭제된 것을 발견했다. 영상을 복구하는 사이 진흥원의 프로그램 운영 시한은 만료되고 말았다.

야마다씨는 "사람들은 10년 전의 일이라고 말하겠지만 내겐 10년 간의 일"이라며 "문제제기를 한 이후 '네가 한국 문화를 몰라서 그렇다', '그 정도 일로 뭘 그러냐'는 식의 시선이 견디기 힘들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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