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이스북
  • 트위터
  • 유튜브

[미래생각]숫자에 의한 통치…'계량화의 환상'

등록 2019.06.06 10:00:00

  • 이메일 보내기
  • 프린터
  • PDF
【서울=뉴시스】정영훈 국회미래연구원 연구위원

【서울=뉴시스】정영훈 국회미래연구원 연구위원

【서울=뉴시스】 최근 정치권에서는 '국가채무비율 40%'가 쟁점으로 부상했다. 지난 5월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국가채무비율을 40% 안팎으로 관리하는 근거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며 '40%'에 집착하지 말라는 요구를 계기로 일부 야당과 언론은 재정건전성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4년 전 새천년민주연합의 대표 시절에 박근혜 정부의 2016년도 예산안에 대해서 재정건전성을 지키는 마지노선으로 여겨 왔던 40%를 깨뜨렸다고 한 발언까지 소개되면서 말바꾸기 논란도 덤으로 추가되었다.

하지만 이 논쟁을 지켜보는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왜 '40%'라는 숫자를 둘러싸고 이토록 치열하게 논쟁하는지에 대해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공공정책의 목표로서 설정된 어떤 특정한 숫자를 둘러싼 정치적 논쟁은 비단 국가채무비율 40%를 둘러싼 논쟁에서 처음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을 수치로 표상하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을 가리지 않고 발견되는 지배적인 현상이기에 새로운 것은 없다. 나아가 이는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매우 빈번히 사용되는 통치 방식이기도 하다.

즉, 숫자에 의한 통치(Governance by Numbers)이다. 진보에 의한, 숫자에 의한 통치의 전형적인 예로써 '최저임금 1만원' 달성을 들 수 있다. 최근 대통령이 어느 공중파 특집 대담에서 최저임금 1만원 공약에 너무 얽매지 않겠다는 발언을 하였지만 진보 진영에서 최저임금 1만원 달성이라는 숫자가 가지는 힘은 여전히 막강하다.

하지만 국가채무비율 40%와 같이, 왜 최저임금이 2020년까지 1만원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상당히 많은 국민들은 충분히 납득하지 못하는 듯하다. 이와 같이 숫자에 의한 통치가 갖는 부정적인 효과는 우리를 일종의 교리적 믿음의 고리 속으로 끌어드린다는 데 있다.

이는 그 수치화된 이미지에 대한 믿음이 그 이미지가 표상한다고 여겨지는 실체나 현실과의 접촉을 점진적으로 대체하기 때문이다. 국가채무비율 40%나 최저임금 1만원을 예로 들면, 이들 지표가 제시하는 수량화된 이미지는 현실의 이미지가 아니라 지표 개발을 주도한 믿음들의 이미지라는 것이다.

프랑스의 명문 '콜레주 드프랑스'의 석좌교수인 알랭 쉬피오(Alain Supiot) 교수는 숫자에 의한 통치는 국가와 기업들을 점점 더 민중들의 삶의 현실과 유리시키는 수량화의 자폐증 속으로 가둔다고 비판하고 있다.

물론 진보적인 노동법학자로서 명망 높은 쉬피오 교수의 숫자에 의한 통치를 통한 비판은 이윤추구를 최고의 가치로 삼고 작동하는 신자유주의 체계에 대한 비판이다. 즉, 비인격적 통치 모델인 숫자에 의한 통치 모델은 인간의 자의성을 완전히 제거한 것으로서 인간을 더욱 자유롭게 하기보다는 생산성과 효율성의 노예로 전락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쉬피오 교수는 숫자에 의한 통치를 통해 시장 전체주의를 비판하고 있지만 이로부터 얻는 시사점도 적지 않다고 말한다. 즉, 시장은 계산과 계량이 가장 잘 적용되는 영역이지만 시장이 적절하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계산에서 벗어나 있는 규범에 근거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금융시장의 붕괴가 보여주듯이 '현실의 역습'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통찰은 국가채무비율 40%나 최저임금 1만원에도 적용할 수 있다. 국가채무비율로 대표되는 재정건전성이나 최저임금은 계산의 영역일 수 있지만 이로부터 벗어나 있는 규범에 근거하지 않으면 국민경제적 위기라는 현실의 역습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숫자에 의한 통치에 대한 쉬피오 교수의 비판은 단지 현실의 역습에 대한 경고에 그치지 않는다. 숫자에 의한 통치는 존재와 사물의 다양성을 양적 계량으로 환원하려는 시도로써 본질적으로 전체주의적 속성을 가진다고 하는 쉬피오 교수의 지적에 주목해야 한다.

국가채무비율 40%나 최저임금 1만원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어떠한 규범과 가치에 근거하여 제시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숫자를 통한 통치는 그 배후에 존재하는 규범적 가치는 사라지고 통계적 정확성만이 중시되면서 민주주의적 토론의 필요성이 무시된다. 이것이 바로 숫자에 의한 통치가 가지는 전체주의적 속성이다.

그렇다고 정부나 연구기관이 제시하는 통계적 수치를 무시하자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계량적 방법을 사용한 측정에는 반드시 판단과 분석이 따르는 것이고 이러한 판단과 분석은 규범과 가치에 근거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측정과 판단 모두가 전문가의 영역이라고 주장하며 이를 독점하고자 하는 세력이 있다는 이들은 민주주의를 부정한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정영훈 국회미래연구원 연구위원([email protected])
일본 교토대학 법학 박사
일본 쿄토대학 법학연구과 연구교수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연구교수
헌법재판연구원 책임연구관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