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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통일 일생 바친 몽양 여운형 선생 서거 72주기 추모식

등록 2019.07.18 11: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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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강화회의 김규식 파견…임시정부서 활발한 활동

조선중앙일보사 사장 당시 '손기정 일장기 말소사건'

광복 후 좌우합작운동 이끌다 극우파 흉탄 맞아 서거

【서울=뉴시스】배훈식 기자 = 지난해 7월19일 오후 서울 강북구 몽양 여운형 선생 묘에서 열린 서거 71주기 추모식 참석자들이 헌화하고 있다. 2018.07.19. dahora83@newsis.com

【서울=뉴시스】배훈식 기자 = 지난해 7월19일 오후 서울 강북구 몽양 여운형 선생 묘에서 열린 서거 71주기 추모식 참석자들이 헌화하고 있다. 2018.07.19.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김성진 기자 = 광복과 조국 통일에 일생을 바친 몽양 여운형 선생의 72주기 추모식이 오는 19일 오전 11시 서울 우이동 선생의 묘소에서 열린다.

(사)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열리는 추모식은 김상출 서울북부보훈지청장을 비롯한 각계 인사, 독립운동 관련 단체장, 기념사업회원 및 유족 등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될 예정이다.

몽양(夢陽)은 1885년 경기도 양평에서 출생해 배재학당, 흥화학교 등에서 신학문을 익혔다.

선생은 1908년 기호학회 평의원으로 활동했고 1910년 강릉의 초당의숙에서 민족교육에 매진했다.

1918년 중국 상해에서 상해고려인친목회를 조직해 총무로 활동하면서 기관지 '우리들 소식'을 발행했으며, 같은 해 8월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총무로 활약했다.

1차 세계대전 후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했으며,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독립문제를 크게 부각시키기 위해 장덕수를 일본에 파견해 2·8독립선언을 촉발케 했다.

또 국내에 김철, 선우혁 등을 파견해 국내 인사들과 접촉하게 하고, 자신도 간도와 시베리아 방면으로 가서 3·1만세운동의 분위기를 진작시켜 나갔다.

선생은 3·1운동 직후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외무부 차장, 임시의정원 의원 등을 역임했다.

이어 같은 해 11월 일본의 심장부인 동경을 방문해 일본 고위 관료들을 상대로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역설해 일본은 물론 국제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1920년 조국의 독립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써 공산당의 원조를 기대해 고려공산당에 가입했으며,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극동피압박민족대회가 열릴 때 조선민족 대표의 일원으로 참석해 조국의 독립을 역설했다.

이어 1922년 10월에는 상해로 돌아와 독립운동의 장기적 구도 아래 백범 김구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해 군사적 투쟁을 준비하기도 했다.

독립운동계에서 임시정부의 재편문제가 부상하자 안창호와 함께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주도했고, 1923년 초부터 국민대표회의가 열릴 때 안창호 등과 함께 '임시정부 개조'를 주장했다.

1933년에는 조선중앙일보사(朝鮮中央日報社) 사장에 취임해 언론을 통한 항일투쟁을 전개했으나 1936년 8월 베를린 올림픽대회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사장직에서 물러났으며 조선중앙일보는 폐간됐다.

일본의 패망을 확신했던 선생은 1944년 8월 비밀리에 건국동맹을 결성해 조국광복을 준비했다. 광복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으나 실패하고 극좌·극우 양측으로부터 소외당한 채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던 중 1947년 극우파의 흉탄에 맞아 서거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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