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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前대통령 서거 54주기 추모식…19일 서울현충원서

등록 2019.07.18 11:3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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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최진석 기자 = 지난 2017년 7월19일 오전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 '이승만 전 대통령 서거 제52주기 추모식'에서 참석자들이 분향을 위해 이동하고 있다 2017.07.19. myjs@newsis.com

【서울=뉴시스】최진석 기자 = 지난 2017년 7월19일 오전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 '이승만 전 대통령 서거 제52주기 추모식'에서 참석자들이 분향을 위해 이동하고 있다 2017.07.19.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김성진 기자 = 이승만 전 대통령 서거 54주기 추모식이 오는 19일 오전 11시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다.

(사)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열리는 추모식에는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청장을 비롯한 각계 인사, 유족, 독립운동 관련 단체장, 시민 등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될 예정이다.

이 전 대통령은 1875년 3월26일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났다.

1896년 서울에서 서재필 박사 지도로 '협성회'를 조직, '협성회회보'라는 주간신문을 발간해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러시아 절영도 조차에 대해 국민이 합심해 국권보호에 나설 것을 촉구해 조차 요구를 철회시켰다.

이후 1899년 1월 만민공동회 활동과 관련된 쿠데타 음모 혐의로 체포돼 종신형을 선고받아 만 5년7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04년 11월 미국으로 건너 간 이 전 대통령은 1905~1910년까지 조지워싱턴 대학, 하버드 대학, 프린스턴 대학에서 각각 학사·석사·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10년 귀국했다.

1919년 4월 상하이(上海)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됐으며, 1921년 5월 워싱턴 군축회의와 1933년 제네바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해 한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했다.

이 전 대통령은 일본이 패망하자 1945년 10월16일 귀국해 "뭉치고 엉키라,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못 사나니 다 같이 하나로 뭉치자"며 단결을 강조했다.

이 전 대통령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취임 후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활동으로 일본 및 총독부에 협력했던 인사들을 처벌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밝혔고, 농지개혁을 추진했다.

이 전 대통령은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내용의 육성을 라디오 방송으로 틀어놓은 채 한강대교를 폭파하고 대전으로 피신했다.

전쟁이 한창인 1951년 11월19일 자유당을 조직하고,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게 돼 있는 헌법을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것으로 개헌을 추진했다.

개헌 추진 과정에서 야당이 반대하자 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 계엄령을 실시하고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키고 제2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북진통일론'을 주장했던 이 전 대통령은 1953년 6월18일 반공포로 석방을 지시해 미국 정부와 갈등을 빚었지만, 정전협정에 반대하지는 않되 참여하지 않는 조건으로 결국 미국과 타협했다.

정전협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미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조인하기도 했다.

전쟁 뒤인 1954년에는 이른바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을 통해 대통령직 연임 제한 조항이 초대 대통령에 대해서는 적용되지 않도록 했고, 1956년 제3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1960년 대통령 선거에 부통령 후보 이기붕과 함께 출마했지만,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이 선거 중 사망하면서 무투표로 제4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1960년 3·15부정선거로 4·19혁명이 발발했고, 4월26일 결국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하와이로 망명했다. 1965년 7월 19일 하와이 호놀룰루 요양원에서 숨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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