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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영화 '나랏말싸미' 외국개봉 더 큰 문제

등록 2019.07.29 13:4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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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영화 '나랏말싸미' 외국개봉 더 큰 문제

【서울=뉴시스】신효령 기자 = '모든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훈민정음을 창제했던 세종의 마지막 8년. 나라의 가장 고귀한 임금 '세종'(송강호)과 가장 천한 신분 스님 '신미'(박해일)가 만나 백성을 위해 뜻을 모아 나라의 글자를 만들기 시작한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아무도 모르는 한글 창제의 숨겨진 이야기.'

영화 '나랏말싸미' 소개 문구다. 세종대왕이 창제한 것이 훈민정음인데,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라니···.

아니나 다를까, 24일 개봉과 동시에 영화는 역사왜곡 논란에 휩싸였다. 영화제작자 출신 조철현(60) 감독의 연출 데뷔작이다. 시비를 예상한 듯 영화 도입부에 '다양한 훈민정음 창제설 중 하나일 뿐'이라는 자막을 넣었다.

그러나 이 자체가 명백한 역사왜곡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왕조 제4대 임금인 세종대왕(재위 1418~1450)은 1443년(세종 25) 음력 12월 말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1446년(세종 28) 음력 9월 한글에 대한 한문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간됐다.

세종대왕이 승려 신미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1446년이다. 신미는 한글을 만드는데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신미가 주도적 역할을 한 것으로 그려진다. 어이없게도 세종대왕이 조력자다. 한글창제의 주역이 바뀐다는 것,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숭상했고 불교를 배척했다. 아무리 상상력을 확장시켜도 조선시대의 승려에게 이렇게 중대한 임무를 맡기기는 어렵다.

영화 예고편 영상마저 불편함을 안긴다. 영상 곳곳에 '역사가 담지 못한 한글의 시작'이라는 문구가 들어가 있다. 2차 예고편에는 신미가 세종대왕에게 "그 자리에 앉았으면 왕노릇 똑바로 하란 말입니다"라고 말하는 장면까지 담겼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세종대왕은 성역에 속하는 존재다. 이순신 장군과 함께 역사상 가장 존경받고 있는 위인이다. 영화에 역사적 사실과 인물을 넣을 때는 철저한 고증이 필요하다. 인물의 업적과 후손에 대한 생각은 물론이고, 국민 정서도 고려해야 한다.

영화에서 세종대왕을 다룬다는 것 자체가 한국인에게는 민감한 문제다. 특히 한글은 우리의 자긍심이다. 독창성과 우수성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일제강점기에 선조들은 우리 말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바쳤다.

역사적 사실과 다르게 만들었으면 타당한 근거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마저도 없다. 더욱 걱정되는 건 해외 관객을 만났을 때다. 일본·대만 등지로 수출돼 개봉을 앞두고 있다. 외국인이 한글창제의 기원을 오해할 만한 이야기다. 영화의 파급력도 크다. 한국 어린이와 청소년에게도 잘못된 역사지식을 심어줄 수 있다.

사극은 '창작'이라는 미명 하에 역사적 사실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 진실을 토대로 영화적 상상력을 가미해야 한다. 창작, 예술의 자유도 관객들이 납득할 만한 수준을 넘지 않았을 때 논할 수 있다. '영화는 영화로 봐달라'고 말하기 전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책임의식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간 이 영화는 '역사가 기록하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홍보해 왔다. '나랏말싸미'는 영화사의 한 페이지에 어떻게 기록될까. 평가는 관객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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