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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종 문화소통]가장 오랜 한국 역사문헌, 3000년 제신홍도관 명문

등록 2019.08.20 06:02:00수정 2019.08.26 10:3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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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종의 ‘문화소통’

<사진> 제신홍도관(帝辛紅陶罐) 명문. 은나라 마지막 천자 제신이 서주 무왕과의 ‘목야대전’을 앞두고 별점을 친 후 새겨 남긴 3천년 된 역사문헌.

<사진> 제신홍도관(帝辛紅陶罐) 명문. 은나라 마지막 천자 제신이 서주 무왕과의 ‘목야대전’을 앞두고 별점을 친 후 새겨 남긴 3천년 된 역사문헌.


【서울=뉴시스】 출토문헌을 포함해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역사문헌은 무엇일까? 이 물음에 일반적으로 고려 때의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를 떠올릴 것이다. 그렇다면 그 문헌들은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 것들일까? 천 년 이상? 아니다! 그에 훨씬 못 미친다. 삼국사기는 김부식이 1145년경에 편찬하였으니, 지금으로부터 874년 전이다. 삼국유사는 1281년 경 일연 스님이 편찬하였으니 그 때는 지금으로부터 738년 전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에 은나라의 마지막 천자 제신이 BC1018년 1월 21일(출처: 西周史之絶代紀年, 국제학술지 ‘은도학간’ 2017년 제2기) 서주 무왕과의 결전을 앞두고 역사적 기록을 새겨 남긴 ‘제신홍도관’이란 출토문물이 있다. 거기에 새겨진 별점 및 전쟁 관련 <사진>의 ‘제신점성도문(帝辛占星陶文)’은 지금으로부터 3037년 전 역사기록이다. 그 기록은 서기 414년의 광개토대왕릉비문 보다 1432년이나 더 오래됐고, 삼국사기 보다는 2163년이나 더 오래됐으며, BC90년 경 완성된 중국 제1의 정사서 ‘사기(史記)’에 비해서는 928년 더 오래됐다. 그러니 이 물건이 기적처럼 한국에 오게 됨으로써 우리나라는 거금 3천여 년으로 올라가는 세계적인 유물을 보유케 된 바, 그 의의와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본 칼럼, 2018년 12월 25일자 “세종대왕, 은나라가 각별했을 것이다…”, 2019년 1월 8일자 “기자(箕子)가 동북으로 간 까닭은, 뿌리로의 복귀”, 2019년 1월 29일자 “우리 조상국, 어느 나라인가…은력 발자취 ‘섣달’” 편 등에서 밝힌 것처럼, 은나라는 우리의 조상국이다. 은나라의 후예인 기자조선이 우리 조상국이라는 역사인식은 은력을 썼던 부여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박은식의 ‘한국통사’(1915)까지 변함이 없었다. 2016.12.9.일자 뉴시스 ‘국정교과서 기자조선 거부, 곧 식민사학·동북공정 수용’ 편에서 밝힌 것처럼, ‘한국통사’에 대응한 일제의 간교한 역사조작으로 우리는 그간 역사를 잊은 민족으로 살아왔다.  

참고로, 은나라 조상들이 창제한 ‘ㅂ(입 구)’자에서 세종은 훈민정음 ‘ㅁ’과 ‘ㅂ’을 취했다(2018.12.18일자 훈민정음은 ‘자방한자’가 아니라 ‘자방고전’ 편 참고). 세종과 그의 신하들은 은나라 문자부터 진시황의 소전체까지를 고전(古篆)이라 불렀다. 정인지는 해례본 서문에서 훈민정음의 제자원리에 대해 “훈민정음 28자는 상형이되, 그 글자들은 (실물이 아니라 기존) 고전을 본떴다(象形而字倣古篆)”고 증언했다. 세종은 1899년에 발견된 은나라 갑골문자를 본 게 아니라 송나라 때 발간된 ‘소당집고록’ 등에 실린 은나라 청동기 문자를 참고했다. 은나라의 갑골, 청동기, 도기 등에 새겨진 문자들은 모두 동일한 은나라 문자다.

제신홍도관의 어깨 부위에 하나의 원을 이루며 새겨져 있는 2개조 60글자에 대한 해독은 다음과 같다. “불길하게도, 금성이 대낮에 나타났습니다. 나(辛)의 군대를 이끌까요? 주후(周侯) 원자 서백의 항오와 그 우군이 주(州) 서읍으로부터 혁명을 일으키는 일이 없을까요? 승하하신 조왕 문정과 부왕 제을께서 돕고 지켜주실까요? 엄정한 기강이 무너지고 방임되는 일이 있을까요? 과연 서백후로부터 그러한 일이 있었다(金見~允自西伯侯)”

“조왕 문정과 부왕 제을에게 文의 세력을 치기 위해 巳日(癸巳日의 간칭)에 석제를 올리면, 우리 군대가 끝까지 갈 수 있을까요? 정수에 제를 올리면, 짐이 재앙을 막을 수 있을까요? 왕이 성조를 살펴 길흉판단을 하여 가로되, “각성이 밝게 빛나니, 나는 文의 세력을 정벌하여 배(=나라)를 평안하고 고요하게 이끌 것이고, 정벌된 문의 땅 서읍은 분봉을 할 것이며, 재앙은 당연히 막을 수 있을 것이다(祖丁乙征文夕巳~它宜御)” (번역 박대종)   

제신홍도관의 위 명문 내용 중, 금성이 대낮에 출현하여 불길한 징조임을 나타내는 ‘金見(금현)’은 BC 239년에 제작된 ‘여씨춘추’ 신대 편과, “문정과 제을에게 巳日에 제를 올림”은 1977년에 발견된 H11:1 제신복사의 내용과 서로 부합하여 교차 검증된다. <계속>

대종언어연구소 소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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