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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주미공사 박정양 친필편지' 131년 만에 귀향

등록 2019.09.17 17:5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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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주미공사 박정양 친필편지. 20.0㎝×24.8㎝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 친필편지. 20.0㎝×24.8㎝


 【서울=뉴시스】 이수지 기자 =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1841~1905)의 친필편지가 131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 친서는 박 공사가 1888년 6월12일 조선에 파견된 미국인 육군교사 존 G. 리에게 보낸 편지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7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한인역사박물관이 소장한 역사자료를 조사하다 박 공사가 쓴 편지를 발견했다. 

박 공사의 미국생활을 기록한 '미행일기(美行日記)'에 따르면, 같은 해 1월말 육군교사로 파견을 앞둔 리 일행이 주미공사관을 방문해 박 공사와 파견인사를 나눴다. 이후 박 공사는 리 일행의 조선 도착을 확인하고 외교 현안에 대한 당부와 안부편지를 보냈다.

박 공사의 편지 발신일과 '미행일기'에서 박 공사가 본국으로 편지를 보낸 날이 일치한다.

이 친필편지는 '19세기말 조선이 근대식 군대설치를 목적으로 사관양성 등을 담당할 연무공원(1888~1894) 설립과정에서 미국 국무부의 추천으로 미군 출신 군사교관을 배치했다'는 역사적 사실과 관련이 깊다.

박 공사는 당시 이 군사교관 일행이 조선으로 가기 전 주미공사관에서 접견했다. 조선에 도착한 이들에게 재차 편지를 전해, 조선 근대화를 위한 미국 측 협조에 감사 인사와 당부를 하는 등 외교적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 친필편지 편지봉투 앞면, 11.2㎝×13.0㎝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 친필편지 편지봉투 앞면, 11.2㎝×13.0㎝


 이 편지는 재미교포 고(故) 맹성렬 씨(2014년 별세)가 2005년 온라인 경매를 통해 구매한 수집품이다. 맹 씨 유족은 5월 이 편지와 다른 수집품들을 한인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재단은 7월 한철호 동국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와 박물관 소장 역사자료를 조사하다 이를 발견했다. 이는 현존하는 유일한 박 공사의 재직시절 친필편지라는 사실도 확인했다.

민병용 한인역사박물관은 "대한민국 문화재청이 워싱턴에 옛 공사관 건물을 구입해 재단과 복원․개관한 사실은 재미한인사회 입장에서 역사적인 일"이라며 "박정양 초대 주미공사의 편지는 한인역사박물관보다 문화재청이 소장하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고 판단해 재단에 기증하게 됐다"고 밝혔다.

한 교수는 편지 발굴의 역사적 가치와 의의에 대해 "박정양 공사 친필편지는 당시 외교 활동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현존 유일본으로 희소가치가 클 뿐 아니라, 현지에서도 활발한 서신왕래를 통해 대미 외교 노력을 기울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잘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 친필편지 편지봉투 뒷면, 11.2㎝×13.0㎝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 친필편지 편지봉투 뒷면, 11.2㎝×13.0㎝

현재 이 친필편지는 국립고궁박물관이 기탁보관하고 있다. 재단은 주미대한제국공사관에 이 친필편지의 정밀 사본을 보내 전시할 예정이다.

18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박정양은 1881년 신사유람단 조사(朝士)로 일본을 시찰했다. 그 후 이용사당상경리사, 성균관대사성, 기기국총판, 협판교섭통상사무, 도승지, 협판내무부사를 지냈다. 1887년 주미전권공사에 임명돼 클리블랜드 미국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하는 등 자주외교를 펼쳤다.

청나라 압박에 11개월 만에 공사직을 물러난 박정양은 1889년 귀국해 전환국관리, 호조판서, 교정청당상 등을 지냈다. 갑오개혁 때 군국기무처회의원, 학무대신, 내각총리대신, 내부대신을 맡아 친미 반일세력인 정동파의 핵심으로 활약했다. 1896년 아관파천 후 내부대신, 총리대신서리로 '독립신문' 창간, 독립협회 설립을 지원했다.1905년에는 을사늑약 무효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병으로 숨을 거뒀다. '미행일기' '종환일기' '미속습유' 등 초기 한미외교사의 주요 자료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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