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이스북
  • 트위터
  • 유튜브

[리뷰]가을에 슈베르트를 입네요, 괴르네·조성진 덕에

등록 2019.09.19 17:49:34

  • 이메일 보내기
  • 프린터
  • PDF
조성진 & 마티아스 괴르네 ⓒ크레디아

조성진 & 마티아스 괴르네 ⓒ크레디아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가을에 슈베르트를 입는다. 

18일 밤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펼쳐진 '마티아스 괴르네, 조성진 그리고 슈베르트'에서 마음 한켠에 살포시 잠들어 있던 슈베르트를 꺼내 입었다.

'독일 가곡의 지존'으로 통하는 바리톤 마티아스 괴르네(52)의 리사이틀에 스타 피아니스트 조성진(25)이 반주자로 나선 자리. 뤼벡 시에 의한 곡 '방랑자'를 시작으로 '하프 악사의 노래'까지만 해도, '역시 가을에 슈베르트' 정도였다.

쇼버 시에 의한 곡 '순례의 노랫가락'에서부터, 가을로 여행을 떠났다. "나는 지상의 방랑자 조용히 집집을 전전한다오", 독일어로 부르는 노랫말의 뜻은 한국어로 번역돼 스크린 위에 두둥실 떴는데 번역된 자막은 시적으로 훌륭했지만 감성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아니었다.

바리톤의 목소리로, 가을 보름달을 닮은 청명함을 뽑아내는 괴르네의 다정한 목소리, 그의 목소리를 담백함으로 받아내는 조성진의 타건 소리만으로 노래의 감성이 전달됐다.

가을이 스산하게 느껴지는 것은 막 시작된 찬바람, 옷을 벗는 나무들 때문만은 아니다. 다들 수확의 계절이라 목소리를 높이지만, 정작 거둘 것이 없음을 깨닫는 순간 청중은 외로운 순례자가 되기 때문이다.
 
가을의 초입, 순례자들이 막 발걸음을 떼는 순간에 괴르네와 조성진이 있어 다행이었다.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바깥에서 밤이 깊어가고, 프로그램도 종반주 저녁을 거쳐 밤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라이트너 시에 의한 '겨울 저녁'은 아늑했고, 마이르호퍼의 시에 의한 '저녁별'은 그리운 거리감에 눈가가 촉촉해졌다. 드라마적 강열함이 농밀하게 무르익은 '여름밤'에서는 잠시 뜨거워졌고 마지막곡 '사랑스러운 별'에서는 몽환적인 음들이 출렁였다. 80분간 들려준 14곡은 서로 다른 열네 길을 천천히 걷는 듯한 정경을 만들어냈다.

[리뷰]가을에 슈베르트를 입네요, 괴르네·조성진 덕에

공연 중간에 들린 스피커음, 첫 번째 앙코르 숭어에 이어 두 번째 앙코르 음악에게를 들려주기 직전 들려온 휴대폰 벨소리는 티끌처럼 느껴졌다.
 
괴르네와 조성진은 작년 4월 오스트리아 빈·프랑스 파리·영국 런던에서 펼쳐진 괴르네의 리사이틀 투어에서 처음 호흡을 맞췄다. 이탈리아 작곡가 휴고 볼프, 독일 작곡가 한스 피츠너 등 진지한 프로그램으로 꾸며진 이 공연에서 조성진은 제대로 된 가곡 반주가 처음이었음에도 "괴르네의 강렬함과 성숙한 통찰력에 뒤지지 않는 연주"(뮤직 OMH)라는 호평을 받았다.

이날 공연은 이 평이 과하지 않음을 확인한 자리다. 원숙함을 품은 50대의 거장, 끊임없이 진화해나가는 20대 한창의 연주자가 충분히 지음(知音)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 무대이기도 했다. 두 사람이 포옹하며, 맞잡은 손을 높이 들 때 단순한 음악 파트너임을 넘어 두 사람은 친구,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날 슈베르트 가곡으로만 채운 프로그램은 느리고 내성적인 곡이 다수였지만 풍성했다. 조용한 밤에 별이 총총 떴다. 기억의 연안에는 푸른 파도가 밀려왔다. 마음은 하얀 절벽에 섰다. 긴 순례를 마친 뒤 돌아온 집에서 다시 슈베르트를 꺼내들었다.

위안이 신기루처럼 마중 나왔다. 순례는 방랑이 아닌, 세상에 맞서기 위한 방탄복을 만드는 과정. 기괴한 길들 사이로 음들로 천사의 비행이 시작됐고, 내일도 슈베르트를 꺼내야지, 라며 잠든다.

괴르네와 조성진은 20일 저녁 경남 통영국제음악당에서도 같은 레퍼토리를 선보인다. 이 음악당 바로 앞에 펼쳐진 검푸른 바다 위로는 어떤 별들이 뜰까. '색채가 풍부한 괴르네와 조성진이 순례를 떠난 해', 이번 가을은 그렇게 기억되리라.


[email protected]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