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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김광림 "주제, 끝까지 추적해야죠"···'살인의추억' 원작자

등록 2019.09.19 11:06:37수정 2019.09.19 11:5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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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제목 '날보러와요'는?

언젠가 범인이 연극을 보러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지은 것

김광림 극작가 겸 연출가

김광림 극작가 겸 연출가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어젯밤 (화성연쇄살인사건 진범을 특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반신반의했는데, 오늘 아침에 뉴스를 살펴보는데 (용의자일) 가능성이 있겠더라고요."

화성연쇄살인 사건을 소재로 삼은 연극 '날보러와요'의 작연출가인 김광림(67)은 19일 뉴시스와 통화에서 전날 이 사건의 유력 용의자가 확인됐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웠다고 했다.

현실은 연극을 낳고, 연극은 다시 현실에 투영되는 장면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날보러와요' 마지막 부분에 사색적인 김형사는 '용의자는 이런 사람일 것'이라고 특정한다. 

김 극작가는 "이 사건에서 살아남은 여성이 범죄자를 묘사한 부분이 있었거든요. (이번에 특정된 용의자가) 그 부분과 유사해요. 등이 굽고 허리가 구부정하다는 표현을 썼는데, 오늘 어느 신문을 보니까 용의자에 대해 그렇게 표현을 했더라고요."
 
화성연쇄 살인사건은 1986년 경기 화성군에서 벌어진 잇따라 강간 살인사건을 가리킨다. 1980년대 전국을 공포로 몰아넣었고, 우리나라 범죄사상 최악의 미제사건으로 남아있었다.

각종 수사 기록을 갈아치웠다. 투입된 경찰 연인원은 200만여명으로, 단일사건 가운데 최다였다. 수사대상자는 2만1280명, 지문대조는 4만116명이었다. 2006년 공소시효가 완료됐으나, 유가족 등이 재수사를 요구해왔다.

이 거대한 기록 앞에서 김 극작가는 꼼꼼한 취재와 치밀한 구성으로 극작의 전범으로 통할 만한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화성연쇄 살인사건을 다룬 문화 콘텐츠 중 가장 잘 알려진 봉준호 감독의 영화 '살인의 추억'(2003)도 이 연극을 원안으로 삼은 것이다. 봉 감독은 FM라디오를 이용한 수사, 형사 중심의 전개 등 부문에서 영감을 받았다.

1996년 2월 김 극작가가 창단멤버로 있는 극단 연우무대에서 초연한 '날보러와요'는 서울에서 새로 부임한 김반장, 사색적인 시인 지망생 김형사, 지역 토박이 박형사, 무술 유단자인 조형사 그리고 경기일보 박기자가 혈안이 돼 범인을 잡는 이야기다.

하지만 특정한 용의자마다 증거 불충분으로 번번이 놓친다. 범인의 범행은 형사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계속된다. 여전히 수법은 잔혹하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사건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지는데 윗선은 압박을 가한다. 형사들은 점점 궁지로 물리고, 진실은 있는데 찾을 수 없다. 이런 철학적인 문제까지 파고든 '날보러와요'는 진실 찾기가 핵심 주제로 국가 시스템의 문제 등의 곁가지도 잘 뻗어 있다.

영화 '살인의 추억'

영화 '살인의 추억'

소재의 잔혹성과 선정성, 괴기스러움 등이 미스터리적 구성을 띤다. 그러면서도 순간순간 인간적인 해프닝들로 인한 웃음으로 긴장과 이완을 오간다.

김 극작가는 해당 사건 외에 경찰의 수사 기법까지 꼼꼼하게 조사했다. 로버트 K. 레슬러의 'FBI 심리분석관' 등을 살펴보고, 당시 우리나라 경찰에서 사용하지 않던 범죄유형분석법 '프로파일링'을 사용해서 용의자를 추적하는 장면도 삽입했다.

연극 '날보러와요'는 한 배우가 여러 용의자를 연기하는 부분이 특기할 만하다. 초연을 비롯 초창기에 용의자를 연기한 류태호는 서울연극제에서 연기상과 인기상도 받았다. 한 배우가 여러 용의자를 연기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에서 출발한 이 연극의 취재는 1994년부터 시작됐다.

수사본부가 아직 화성경찰서에서 있을 때였다. 범인이 잡히지 않자, 범인이 경기 화성인 아닌 우주 화성에서 온 것이 아니냐는 자조 섞인 말이 나왔을 정도로 분위기는 암울했다. 연극 제목은 어딘가 범인이 존재하면, 연극을 보러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지은 것이다.

김 극작가가 취재를 위해 찾아간 해당 사건들의 형사들은 처음에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김 작가의 진심과 절박함은 통했다. 연우무대 단원 서너명과 세 번째 찾아간 뒤부터 차차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도움이 꼭 필요하다"고 거듭 호소했다.
 
결국 어느 형사는 김 극작가를 차에 태우고 1차부터 9차까지 사건 현장을 모두 다니며 적극적으로 도왔다. "어느 현장은 머릿속에 아직까지 생생히 남아 있어요. 그 분의 도움이 컸죠. 아직도 그분 생각이 납니다."

'날보러와요'는 초연 이후 여러 차례 무대에 올라 지금까지 10여차례 공연, 최소 10만명 관객을 모았다. '살인의 추억'이 불러 모은 관객 510만명과 비교하면, 적어보이지만 연극계에서는 대박이다. 공소시효가 만료된 2006년 이 연극이 공연했는데 공연장 로비에서 공소시효를 연장하는 서명 운동이 벌어지는 등 사회적으로도 영향을 끼쳤다.

초연 당시에 입에 조차 담기 힘든 무거운 사건을 무대화한 뚝심에 대중은 더 관심을 쏟았다. 그러나 재연이 될수록 작품 자체의 완성도, '진실은 있는데 찾을 수 없는 상황' 등의 철학적 상황에 대중은 더 집중했다. 

좋은 작품은 국경, 시대를 한정짓지 않는다. 연극 '날보러와요'가 일본까지 진출한 것이다. '살인의 추억'이 일본에서 인기가 높은데 일본 연극인들 사이에서 이 작품의 원작이 연극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성사됐다. 작년 일본 신주쿠의 소극장에서 공연한 이후 입소문이 더 퍼졌다.

연극 '날 보러 와요'

연극 '날 보러 와요'

지난 13일 일본 공연계 메카로 통하는 도쿄 신국립극장에서, 현지에서 명망이 높은 요리코 준의 연출로 막을 올렸다. 올해 개관 24년째인 이 공연장에서 한국 극작가의 단독 희곡을, 일본 연출가가 선보이는 건 처음이다. 평소 대관 경쟁률이 200대 1로 알려진 곳이다. 일본 최고의 엔터테인먼트사 에이벡스 등이 제작사로 참여했고, 박 기자 역을 현지에서 인기 아이돌이 맡는 등 유명 배우들도 대거 참여했다. 16일까지 신국립극장에서 공연한 이 작품은, 19~20일 오사카의 산케이홀 무대에도 오른다.

김 극작가는 "연출가가 저와 다른 해석을 한 장면들이 있는데 신선하더라고요"라면서 "무엇보다 무대, 조명, 영상 사용이 좋았어요. 영상은 연극 무대에서 사용하면 들러붙기가 어려운데, 영상이 무대 안으로 잘 들어왔다"고 했다.

한예종 연극원 교수, 서울문화재단 이사장을 지낸 김 극작가는 한국 연극계 대표적인 극작가 겸 연출가로 통한다. 1970년대 창작극을 중심으로 의식 있는 연극 운동을 펼쳤던 대표적인 단체(서울대 연극반)와 극단(연우무대)을 두루 거쳤다.

도시 빈민을 다룬 그의 데뷔작 '아침에는 늘 혼자예요'(1978)가 대표적이다. 당시 이런 창작극을 선보이는 것이 예술운동의 성격이었다.

하지만 이후 스스로 부족함을 느낀 김 작가는 뉴욕행 비행기를 탔다. UCLA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그는 서울예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극작에서 기술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후 한예종으로 옮기고 극작 커리큘럼을 짜면서 자신도 배워나갔다. 그래서 탄생한 작품이 '날 보러 와요'였다.

김 극작가가 생각하는 '좋은 극작술의 조건'은 무엇일까. "사실적인 작품이거나 그렇지 않은 작품이건 리서치를 많이 해야 해요. 충분한 레퍼런스를 갖는 것이 중요하죠. 무엇보다 이야기의 주제를 끝까지 추적하려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공소시효가 끝나고도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추적한 경찰의 집요함과 겹쳐진다.
 
이번 용의자 특정과 함께 영화 '살인의 추억' 재개봉 이야기가 배급사의 부인에도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다. '날보러와요'는 최근 '대구국제호러페스티벌'을 통해 재공연했는데 당분간 서울에서 공연할 계획은 없다고 했다. 서촌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글쓰기에 주력하고 있는 김 작가는 "내년쯤에 오픈하려는 계획을 갖고, 글을 쓰는 중"이라고 했다.

김 극작가의 신작은 어떤 생명력을 갖고 태어날까. 그는 이번에 현실, 연극, 영화가 영향을 주고받은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순환고리를 보면서 연극의 힘에 대해 다시 한번 느꼈다고 했다.

"연극 자체는, 관객수가 제한됐고 확대 생산이 어려운 장르에요. 하지만 이번에 보면서 오리지널 예술로서 타 예술에 영향을 미치는 힘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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