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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책] 가을 호수를 닮은 서정적 산문집

등록 2019.09.19 11:23:55수정 2019.10.28 17:5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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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유서가 '단정한 기억'

[오늘의 책] 가을 호수를 닮은 서정적 산문집


【서울=뉴시스】정철훈 기자 = 가을 호수는 그 잔잔한 수면에 하늘을 떠가는 구름을 비춘다. 이때 수면은 명경지수(明鏡止水)의 상태가 된다. 밝은 거울과 정지된 물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실제 수면은 정지되어 있지 않다. 구름의 자취와 물방울을 뽀글거림이라는 외부와 내부의 압력을 스스로 견디고 있는 상태를 유지할 뿐이다.

1999년 서울신문으로 등단해 20년 동안 필력을 과시해온 비평가 유성호(한양대 국문과 교수)의 첫 산문집 '단정한 기억'에 손을 갖다 대면 짙어가는 가을 호수의 물이 묻어 나올 것만 같다.

"비평가가 이렇게 재미있게 울림 깊게 쓰면 안 되는 거잖아!"(소설가 김종광)의 애정 어린 발문에서도 알 수 있듯 유성호라는 가을 호수는 깊이를 모를 기억으로 침잠한다. 그 침잠은 '문학적'이 아닌 '인간적'인 자전의 기억으로 더욱 푸르다.
 
아버지를 그리워했던 유년이며, 중3 때 백일장에서 상을 받으며 문청으로 들어서게 된 이야기, 그리고 기억의 고고학자가 되겠노라 마음먹고 근대 문학의 정전을 파헤치며 연구자가 되고 학자가 되기까지의 진솔하고 감동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다. 특유의 단아한 문장에서 오는 따스함은 각별하다.

"이번 산문집을 계기로 나는 어쩌면 에세이스트를 꿈꾸는 도정에 접어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딱딱하고 규준이 정해져 있는 논문이나 평론에서 조금 비켜서면서, 나는 이러한 글쓰기가 비교적 자유롭고 또 경험적인 부분을 많이 개입시키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최대한의 장점으로 누렸다. 이제는 실험하며 물어보고 반성하고 몰두하며 집중하고 음미하는 과정으로서의 에세이를 가파르게 선호하게 될 것 같다."('작가의 말')
 
오랜 시간 문학을 사랑해온 사람이 쓴 산문이기에 문장의 결이 지닌 섬세함이 어느 문학작품 못지않게 아름답다. 한 꼭지를 읽어본다. 근대 초기의 걸출한 화가이자 여성운동가였던 나혜석과 동경유학생 최승구의 사랑에 대한 글이다.

 "그때 나혜석은 두말할 것 없이 귀국하여 최승구가 요양중이던 전라도 고흥에 가서 무려 열흘 동안이나 정성스런 간호를 한다. 방을 치우고 화분을 들이고 깨끗이 그의 몸을 씻기고 그의 얼굴을 스케치하는 등 열흘 동안 이들은 병중의 로맨스를 완성한다. 병세가 나아지자 나혜석은 동경 길에 올랐고, 동경에 도착한 지 닷새 만에 최승구의 사망 소식을 접한다."('연애란 무엇인가'에서)
 
사망 전보를 차마 볼 수 없어 동생더러 뜯어보라고 하고 나서, 나혜석은 애도의 답전을 보내고, 다시 그 답전을 관 속에 넣었다는 소식이 고흥으로부터 온다. 답전의 마지막 구절은 숨이 막힐 지경이다.

"간단하고 명백하고 심오하고 철저한 그 말. '오해 없이 영원히 잊어주시오.' 이는 내 초련(初戀)의 최초요, 최종 말이었다."
 
5부로 짜인 이 책의 갈피들은 나혜석, 정지용, 채동선, 서정주, 윤동주, 마광수, 황현산, 기형도 등의 삶과 작품을 다루고 있다. 마지막 5부는 종교적 관심에서 출발한, 성서에 관한 에세이나 인간 존재의 보편적 조건에 관한 성찰의 글을 담았다. 저자의 실존적 탐구와 고백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올 가을의 결실이자 수면에 잔잔하게 번지는 동심원이다. 유성호, 1만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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