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이스북
  • 트위터
  • 유튜브

박제가의 그림에 숨겨진 비밀 추적기

등록 2019.09.26 16:41:02

  • 이메일 보내기
  • 프린터
  • PDF
【서울=뉴시스】1790년 베이징

【서울=뉴시스】1790년 베이징

【서울=뉴시스】정철훈 기자 = [오늘의 책] 1790년 베이징/신상웅

양반가의 서자로 태어나 신분의 제약과 차별을 겪었고, 그 때문에 외려 봉건주의의 인습에서 벗어나 진보적 실학을 추구했던 조선 후기의 실학자 박제가(1750~1805).

그는 명을 사대하고 청을 업신여기던 조선에 개혁적으로 청의 선진 문물과 풍속을 소개한 '북학의'로 유명하다. 하지만 실학자이기 전에 시와 그림으로 고독을 달래던 천생 예술가였다. 그런 그가 남긴 의문의 그림이 있으니 '연평초령의모도(延平髫齡依母圖)'다. 
 
'어린 연평이 엄마에게 의지해서 살다' 쯤으로 해석될 이 그림(가칭 '모자도')엔 박제가의 이름이 남겨져 있으나 그의 솜씨로 볼 수 없을 만큼 전문가적인 화풍을 자랑한다. 연평(延平)은 명나라 말기에 이름을 떨친 장군이자 남중국해를 중심으로 국제무역을 장악했던 해상왕 정성공(鄭成功)이라는 특별한 인물을 가리키는 여러 호칭 중 하나다.

먼저 그림을 감상해보자. 엄마와 어린 아들이 멀리 바라보이는 설산을 배경으로 2층 집에 있다. 서양화에나 있는 원근법 이나 채색, 그리고 사물의 배치가 정갈하기 이를 데 없는 뛰어난 화공의 솜씨다.
 과연 박제가가 그림을 그렸단 말인가. 저자는 박제가의 일대기를 근거로 상상력을 발휘한다.

"청계천 위에 복원된 광통교는 조선 시대 종로에서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대로의 중심이었다. 남산 아래 집을 나온 박제가는 광통교를 건너 탑골공원 주위에 몰려 살던 지인들을 찾아가곤 했다. 이제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인물 박지원과 이덕무와 유득공 등이었다. (...)두 사람은 순서대로 박제가와 함께 베이징에 가기도 한다."

추리를 해나가면서도 의문이 가시지 않았던 저자는 문제의 그림에 숨겨진 비밀을 좇아 한국과 일본, 중국을 오갔다.  국내 학계에서 위작이라고도 말하는 이 그림이 정말 박제가가 그린 것이 맞는가, 아니면 이름 모를 조력자라도 있는 것인가. 청나라가 천하를 호령하던 때에 무슨 이유로 명나라 장수의 어린 시절을 그리는 위험을 무릅썼는가.

질문은 20년 이상 계속되었다.

【서울=뉴시스】박제가 그림

【서울=뉴시스】박제가 그림

"'모자도'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림의 중앙을 차지한 2층짜리 서양식 건물에 집중했고 건물의 묘사에서 보이는 투시 원근법을 이야기했다. 당연했다. 조선 회화의 역사에서는 유래를 찾기 어려운 장면이었고 이런 그림을 박제가가 그렸다는 사실에 다들 놀랐을 테니까. 이채로운 건물만큼이나 그동안 보지 못한 낯선 기법이었다. 그래서 서양 화법이 조선으로 전해진 사례로 종종 등장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낯선 서양의 기법이 어떻게 박제가에게 전해졌는지는 왜 누구도 묻지 않았을까?"

 마침내 저자는 '모자도'의 배경을 일본 나가사키 현 북부의 히라도 섬이라고 추론하기에 이른다. 멀리 눈 덮인 후지산이 바라다보이는 히라도. 일본에서 맨 처음 서양식 건물이 세워진 곳이 히라도였고 더구나 네덜란드 상관(商館)이 건재했던 시기는 정성공의 어린 시절과 겹쳐진다. '모자도'는 누군가의 상상력만으로 그려진 그림이 아니었다.
 
이렇게 짚은 저자는 또 다른 난관에 부딪힌다. "가장 근본적인 숙제가 있었다. 바로 '모자도'의 과거, 즉 탄생의 비밀에 관한 것이다. 박제가의 글에 따르면 '모자도'의 원작자는 조선의 '최 씨'다. 최 씨로는 현재까지 최북 이외의 다른 인물을 상정하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반드시 그라는 뚜렷한 증거가 있지도 않았다. 다만 가장 가능성 높은 추정에 해당할 뿐이다."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면 '연평초령의모도'에 박제가의 이름이 있으되 그가 그렸다고 믿기 어려운 정황이다. 어느 날 저자는 이 그림에서 박제가 말고도 '양주팔괴'로 유명한 중국화가 나빙의 붓질이 보인다는 미술사학자 이동주 선생의 짤막한 글을 발견하고 다시 뒤를 좇는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나빙(羅聘)이라니, 그라면 얘기가 달랐다. 그는 청나라를 대표하던 이름난 화가 중 한 사람이고 1790년 사신단의 일원으로 베이징에 머물던 박제가와 유독 가깝게 지낸 사이였다. (...) 나빙과 '모자도'가 어떤 연관이 있다면 왜 그의 이름은 그림에 남아 있지 않을까.'

아는 만큼 보이는 게 그림이라지만 모든 그림은 끊임없이 말을 거는 기물이기도 하다. 섬세한 독자들에겐 올 가을의 탐독서가 될 것이다. 서울대 미대 출신의 화가이자 염색가인 신상웅. 동아시아 쪽 염색 현장을 찾아나선 '쪽빛으로 난 길' 이후 두번 째 책이다. 마음산책, 335쪽, 1만6000원.


[email protected]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