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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책]부산에 묻힌 영국병사에게 아직 묻지 못한 것

등록 2019.09.30 11:26:33수정 2019.10.28 17:5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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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 '영국청년 마이클의 한국전쟁'

[오늘의 책]부산에 묻힌 영국병사에게 아직 묻지 못한 것


【서울=뉴시스】정철훈 기자 = 어느 때보다 혹독하게 추웠던 1950년 겨울, 각자 사연을 가진 영국 청년들이 군복을 갖춰 입고 부산항에 들어왔다. 영국보다 네 배나 더 추운 한국에서 젊은 군인들이 맞닥뜨린 상황은 열악했다. 쏟아지는 폭우에 진흙을 온통 뒤집어썼고, 변변한 월동준비를 하지 못한 탓에 동상에 걸려 발가락을 자르기도 했다. 샤워실은커녕 화장실도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병사들은 전투에서뿐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도 고군분투했다. 참전군인들은 대부분 열여덟, 열아홉살로 어린 의무징집병이었다.

 국가청소년위원회 무지개청소년센터와 북한대학원대학교 연구원으로 활동하다가 2016년 영국으로 이주하면서 연구 활동의 범위를 한국전쟁과 분단문제로 확장해온 이향규(52). 그는 유엔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으나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부산에 묻힌 영국청년 마이클 제임스의 사연을 비롯, 북에 두고 온 가족을 끝내 만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자신의 아버지에 이르기까지 한국전쟁과 연루된 수많은 이야기를 발굴하는 긴 여정에 나섰다.  

영국에서는 한국전쟁을 '잊힌 전쟁'(Forgotten War)이라고 부른다. 2014년에야 런던 템즈강변에 한국전참전기념비가 제막되었으며, 그 이전까지는 런던에 제대로 된 한국전쟁 기념물 하나 없었다. 군인들은 전장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싸늘한 대우를 받았다. 군사를 파병한 영국정부는 마땅한 기념식을 거행하지도,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참전 사실을 제대로 가르치지도 않았다. 저자는 “‘잊힌 전쟁’이라는 말은 시간이 지나면서 망각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아무도 기억하지 않은 전쟁이라는 뜻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에게조차 이 전쟁이 점점 잊히는 것은 아닌지 경계한다.

잊힌 전쟁에서 사라진 이름들을 호명하며 시작된 여정은 저자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로 이어진다. 아버지가 전쟁 중 쓴 일기와 생전에 남긴 자서전은 고스란히 저자의 DNA로 흘러든다.
 
 "1951. 1. 5. 수. 맑음. 오늘 아침 도보로 방어진까지 가겠다고 한다. 말만 들어도 울 것 같다. 2시경에 방어진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방어진에 가면 배가 있다고 한다."
 "1951. 5. 18. 금. 맑음. 우동에 밥을 넣고 먹었다. 화차에서 일을 했다. 코는 꽉 멘다. 일을 하기 싫다. 밤에 병석에게서 돈을 취해 600원에 밥 한 그릇 사 먹었다. 골이 아파 오전부터 잤다. 감기가 떨어지지 않는다."

아버지의 일기를 읽는 딸의 눈시울을 뜨거워진다. 그러나 뜨거운 눈시울로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건 아버지의 개인사로 국한될 문제가 아니다. 공공성으로서의 진술이 아니던가. 뒤늦게 일기를 찾아 읽던 저자는 고인이 된 아버지에게 묻는다.

"아버지 일기를 읽으면서 궁금해진 게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미국은 어떤 존재였나요? 그들은 무서웠나요? 고기에 감자를 넣은 것을 주는 그들이 고마웠나요?"
 대답은 없다. 그래서 저자 스스로 대답을 찾아 나선다.

무대는 영국으로 옮겨진다.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마이클 호크리지가 다녔던 학교의 성당에는 그 학교 출신 전사자들을 기리기 위한 추모벽이 남아 있다. 거기에 마이클에 대한 기록은 "1952년 2월 6일 한국에서 전사했다' 단 한 줄뿐.
저자는 단 한 줄의 기록에서 시작해 마이클의 생애를 다시 그려냄으로써 독자들이 마이클과 그를 비롯한 참전군인들의 삶을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그도 부산에 묻혀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유엔기념공원 웹사이트에 들어가보았습니다. 지난번 웹사이트를 방문했을 때 안장된 전사자를 확인할 수 있는 검색기능이 있다는 것을 알았거든요. 그는 거기 있었습니다. 사이버 헌화를 했습니다."

마이클에 대한 매장 기록은 고스란히 '마이클 기억하기'로 승화한다. 땅에 묻힌 비극을 발굴해 햇빛을 쪼여주는 일. 달리 말하면 이게 바로 남북한이 해야 할 일이다. 남북통일 전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사이버공간에 한국전쟁 당시 사망자 명단과 매장기록 등을 망라한 '남북사이버추모공원'을 당장이라도 추진할 필요가 있다. 뜨거운 눈시울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이향규. 253쪽, 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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