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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책]줄리언 반스도 이상했던 그림, 발로통 '거짓말'

등록 2019.10.07 11:15:29수정 2019.10.25 15: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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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북스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

【서울=뉴시스】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산책

【서울=뉴시스】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산책


【서울=뉴시스】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그의 그림은 이상하게 눈길을 끈다. 2016년 프랑스 국립 오르세미술관 컬렉션이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 상륙했을때도 그랬다. 밀레, 반 고흐, 르누아르, 모네, 폴 고갱 등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거장'들의 명작 131점속 유난히 그 그림이 발길을 잡았다.

어디서 본듯한 그림. 목욕탕 풍경의 '단장하는 여인들'은 분명 에드가 드가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리의 그림 같은 분위기를 전했다. 하지만 알고보니 좀 낯선 이름의 스위스 출신 펠릭스 발로통(1865~1925)이었다. 선배 화가들이 남긴 누드화를 짜깁기해낸 짖궂은 화가로, 단일 색조를 사용하고 있어 나비파로 분류된 화가였다.

명화 거장들과 호흡했지만, 유명세가 덜했던 발로통을 다시 만난 건 이 책에서다.

맨부커상을 수상한 영국 문학의 제왕 줄리언 반스의 첫 예술 에세이 '아주 사적인 미술산책'을 후르륵 넘기던 순간, 멈췄다.

빨간 그림, 발그스레 취한 남녀가 소파에 엉켜 있는데, 색깔 때문일까? 가까이 대고 보아도 검은 남자보다 빨간 여자의 몸이 자꾸 부풀어오르는 듯 했다.

'끌어당김의 법칙'을 이용한 걸까? 그 그림에 고정했던 눈은 그림과 함께 달린 제목을 보고 눈앞에 'ㅋㅋ'를 썼다.

발로통 '거짓말'.

여자의 몸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던 기자처럼, 줄리언 반스도 경험했다. 그는 책에 이렇게 썼다.  "다시보니 이 그림속 여인의 부피 큰 원통형 육체가 두드러지는 듯 했고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놀랐다"며 "이상한 일"이라고 했다.
                                                                                                                                                                                                                                                                                                                                                                                                                                                                                                                                                                                                                                                                                                                                                                                                           
"그림의 크기가 그처럼 작을 줄이야-실로 전시된 작품 중 가장 작은 그림이었다(33×24cm)볼티모어에서 처음 이 그림을 본 뒤 취리히에서 다시 보기 전에 그 크기가 어느 정도 되는지 질문을 받았다면 아마 실제의 네 배 정도는 크게 대답했을 것이다. 감탄을 느낄 뿐 아니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림에 시간과 부재가 그런 작용을 하다니. 이상한 일이다. 어렸을때 살던 집에 가보면 상상해온 모습보다 작고, 그럼에도 여전히 그 상상속 크기로 남게 되는 이치와 마찬가지다. 그림의 경우 작은 그림은 실제보다 크게, 큰 그림은 실제보다 작게 기억에 남는 경향이 있다. 왜 그런지 나도 모르겠지만 기꺼이 불가사의한 일로 남겨둔다.-발로통의 경우, 그러는 게 적절하리라"(P284)

줄리언 반스는 "1990년대 볼티모어 미술관에서 '거짓말'의 덫에 걸려들었다"고 했다. 당시 존스 홉킨스대학에서 한 학기를 가르치는 동안 수업이 없을 때 볼티모어 미술관을 들르곤 했다. 미술관은 학교에 있었다. "처음에는 마티스나 다른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에 정신이 팔렸지만, 끝까지 나를 가장 충실하게 붙잡아둔 것은 스위스 화가 펠릭스 발로통이 그린 '거짓말'이라는 제목의 작고 강렬한 유화였다."

1897년에 완성된 이 작품은 미술 컬렉터 에타 콘이 그로부터 30년뒤 스위스 로잔에 사는 미술상이자 발로통의 형인 폴에게서 구입했다. "가격은 800 스위스프랑이었으니 그녀가 같은 날 같은 미술상에게서 드가의 파스텔화 한 점을 2만 프랑에 샀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푼돈에 지나지 않은 금액이다."(p261)

발로통의 '거짓말'이 볼티모어 미술관 소장품이 되기까지 사연은 동시대 사회문화관점에서도 시사점을 던진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다. 책에 따르면 볼티모어 미술관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누른 계기이기도 하다.

 미국 볼티모어 거부였던 콘 집안의 두 자매인 클라리벨 박사와 에타 양 덕분이다. "재산을 물려받은 자매는 그것을 미술에 쓰기로 했다"

자매는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몇 십년에 걸쳐, 주로 파리에서 다량의 마티스 작품외에 피카소와 세잔 반 고흐 쇠라 고갱의 작품을 모았다." 그러다 1929년 클라리벨 박사는 미술사에서 가장 교묘한 유언장을 남기고 죽었다.

"두 사람의 소장품에서 그녀의 몫은 우선 에타에게 물려주되 '현대미술에 대한 볼티모어 시민들의 의식이 향상되면 에타가 죽을 때 그것을 지역 미술관에 기증하기를 바란다'는 지시나 의무가 아닌, 제안이 그 유언장의 내용이다. 죽음을 눈 앞에 둔 여자가 볼티모어시 전체에 던진 이 놀라운 과제에는 그 조건이 충족되지 못할 경우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수혜자로 지정한다는 제안 내지는 협박이 결부되었다. 그로부터 20년뒤인 1949년 에타 양이 죽기까지 메트로 폴리탄 미술관은 당연히 엄청난 정치적 공작을 벌였지만, 패기만만한 볼티모어는 결국 자격과 현대성을 갖췄음을 입증했다."

 줄리언 반스는 볼티모어 미술관을 방문할 이유를 하나만 꼽는다면 그건 바로 콘 소장품이라고 했다.

한 쌍의 남녀가 소파 위에 엉켜붙어 있는 발로통의 '거짓말' 그림속으로 다시 가보자.

"선명한 진홍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의 곡선이 검은 색 바지를 입은 남자의 다리 사이에 묻혀있다. 여자는 남의 귀에 대고 무언가 속삭이고 있다. 남자는 눈을 감았다. 남자의 얼굴에 자기 만족의 웃음이 어려 있고 왼쪽 발끝이 쫑긋 들린 경쾌한 자세로 알수 있는 순진함으로 보아 거짓말의 주체는 여자임이 분명하다. 여자가 무슨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만 남는다. "사랑해요"라는 그 고전적인 거짓말일까? 아니면 여자의 드레스가 불룩한 것으로 미루어 또 다른 고전, "물론 당신 아기죠"라는 말일까?"(p261)
 
소설가가 풀어내는 미술 이야기는 역시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번 보면 멈출수 없게 시청하게 하는 '넷플릭스 시리즈 영화'를 보는 듯 하다. 

명화의 이름과 캔버스 뒤에 숨은 그림들이 역사의 닻줄을 풀어 던지고 자유로워졌다.

발로통을 비롯해 들라크루아, 마네, 세잔을 거쳐 마그리트와 올든버그, 하워드 호지킨까지 낭만주의부터 현대 미술을 아우르는 17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렇다기보다는 이렇다'며 회화의 유쾌한 재미와 유익한 지적 교양까지 선사하는 섬세한 그림 에세이다.

"미술은 단순히 흥분을, 삶의 전율을 포착해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미술은 가끔 더 큰 기능을 한다. 미술은 바로 그 전율이다."(줄리언 반스) 424쪽, 1만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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