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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책]미 해병대원의 눈에 비친 지옥에서 2년

등록 2019.10.29 11:22:58수정 2019.10.31 11: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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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책들 '태평양 전쟁: 펠렐리우·오키나와 전투 참전기 1944~1945

[오늘의 책]미 해병대원의 눈에 비친 지옥에서 2년


【서울=뉴시스】정철훈 기자 = 1923년 미 앨라배마주 모빌 태생. 1942년 미 해병대 입대. 제대 후 생물학 박사학위를 받고 몬테발로 대학에서 생물학 교수로 재임. 2001년 사망.

유진 B. 슬레지의 짧은 이력이다.

짧은 이력 가운데 비어있는 공백이 있다. 슬레지는 제 2차세계대전에서 가장 치열했던 펠렐리우 전투(1944)와 오키나와 전투(1945)에 박격포병으로 참전했다. 나중에 생물학자가 되었지만 그는 논픽션 '태평양 전쟁'(원제 With the Old Breed)를 펴냈고 2010년 이 책을 원작으로 한 HBO 미니 시리즈 '퍼시픽(The Pacific)'이 방영되면서 초판 출간 이후 29년만에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슬레지가 첫 번째로 투입된 전장은 팔라우제도의 산호섬 펠렐리우였다. 남북으로 9킬로미터, 동서로 3킬로미터 크기로 '지도의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모를 만큼' 작은 섬이었다. 맥아더 장군이 굳이 이 섬에 주목한 것은 필리핀으로 진격하는 연합군의 우익선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지휘관들은 사나흘이면 끝날 전투라고 호언했지만, 일본군이 섬 지하에 굴과 터널을 파서 방어 진지를 구축하면서 전투는 장기전으로 흘러갔다.

미군은 산호 능선을 오가며 방어 진지를 하나하나 격파해야 했고, 1944년 9월 중순부터 11월 말까지 10주간 벌어진 전투는 군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해변은 두꺼운 층의 검은 연기와 화염에 싸여 있어서 (…) 마치 대규모 해저 화산이 분화하는 모습 같았다. 섬을 향해 다가간다기보다 불타오르는 지옥 밑바닥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실제로 우리 대원들 가운데 많은 이들에게 그곳은 망각의 현장이 되었다."(124쪽)

작은 산호섬은 '절대적인 파괴와 황량함의 극치' 속에 외계의 행성처럼 변해 갔다. 이빨이 뽑힌 채로 마치 웃고 있는 듯한 표정의 사체들은 기괴한 자세와 상태로 여기저기 도처에 널려 있었고, 작전 지역에 방치된 적들의 사체는 일종의 랜드마크 기능을 했다. 시체와 오물도 넘쳐났고, 그로 인해 청파리가 들끓었다. 심지어 고장 난 장비가 쌓이면서 섬 곳곳이 쓰레기장이 되었다.
 
"위생병은 등을 대고 누운 자세였고 배는 찢긴 채 활짝 열려 있었다. 잘게 부서진 가는 산호 가루들이 붙어 있어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창자를 보는 순간 나는 충격을 받았다. 조금 전까지 살아 있었을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133쪽)

결국 일본군이 전멸한 뒤에 전투는 끝났지만 일본군 1만1000여 명이 죽고, 미군 8769명이 죽거나 다쳤다. 하지만 이 책에서 주목할 부분은 생물학적 지식을 가진 슬레지의 문체다. 그는 썼다. "내 안에 있던 어떤 것이 펠렐리우섬에서 죽고 없어졌다. 어쩌면 그렇게 죽고 없어진 것은, 인간은 기본적으로 선하다는 것을 신념으로 받아들이는 유치한 순진함일지도 모른다."

 슬레지의 두 번째 전장은 태평양 전쟁 최후의 전장인 오키나와였다. 오키나와엔 10만 명이 넘는 일본군 정예 부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1945년 4월 1일, 미군은 전함과 함재기, 전차가 총동원된 상륙 작전을 전개했고, 슬레지와 해병대원들은 수륙양용선에 올랐다. 그러나 막상 도착한 해변에 일본군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슬레지와 고참병들은 혼란에 빠졌다. 초반 전투에서 미군은 기세 좋게 오키나와 북부와 중부를 손에 넣었지만, 남부의 전황은 악화일로였다. 슬레지는 슈리 전선에 투입되었지만 5월 이후 엄청난 폭우가 쏟아져서 군인들의 전투 수행에 막대한 지장을 주었다. 참호 안으로 빗물이 끊임없이 들이쳤고, 진흙 때문에 차량 이동이 쉽지 않아 보급도 어려웠다. 시체 주변 1~2미터에는 구더기들이 기어 다니다가 비가 오면 빗물에 쓸려 가곤 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군인들은 전쟁 피로증(combat fatigue)에 시달렸다. 증상은 다양했다. 무방비로 상황 파악을 전혀 못하는 병사도 있었고, 계속 울기만 하는 병사, 큰 소리로 절규하는 병사도 있었다. 오키나와에서 미군 사상자는 실종자를 포함해 사망자가 7631명이었고 부상자는 3만1807명에 이르렀다.

이 가운데서 전쟁 피로증으로 인한 정신질환자는 2만6221명이었다.  슬레지 역시 악몽에 시달렸다.

"나는 죽은 해병대원들이 벌떡 일어나 소리도 없이 그 구역 주변을 돌아다니는 상상을 했다. 늘 똑같은 꿈이었다. 죽은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던 포탄 구덩이나 진흙탕에서 슬금슬금 일어나서는 구부정한 허리로 다리를 질질 끌면서 여기저기 아무런 목적도 없이 어슬렁거렸다."

작전에 투입된 K중대원 485명 가운데 중 살아남은 인원은 슬레지를 포함해 50명 뿐이었다.
8월 8일, 최초의 원자폭탄이 일본에 투하되었고, 일주일 뒤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전쟁은 끝났다. 슬레지는 그 순간을 이렇게 기록한다. "지옥의 구렁텅이에서 살아남은 많은 대원들은 멍한 눈을 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전쟁이 없는 세상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지 가늠하려고 애를 썼다."

전쟁은 끝났지만 슬레지는 '조국을 위해서 흘린 피'라거나 '생명의 피를 바쳐 희생' 등 정치인과 신문기사의 수사가 얼마나 공허한지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전우가 흘린 피의 덕을 보는 것은 그저 파리들뿐이었다. 슬레지가 회고록에서 내비치는 생각은 좀 복잡하다. 그에게 전쟁은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평생 전쟁의 후유증으로 고통받아야 했기에….

슬레지가 오키나와 하프문 고지에서 '얼굴이 반쯤 날아가고 없는' 해병대원의 입을 빌려 들려주는 비웃음과 저주는 살아남은 군인들의 운명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나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어리석음의 결과물이다. 나는 대량학살의 열매이다. (…) 지금 내 모습을 봐라. 죽은 우리는 모든 게 다 끝났다. 하지만 너는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하고, 평생 그 모든 기억을 짊어지고 살아야 할 것이다."

아무도 전쟁에 참가한 군인들의 내면을 이해할 사람은 없다. 전쟁의 고통은 고스란히 참전병 개인의 몫일 뿐이다.
 이경식 역. 556쪽, 2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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