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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백혜선, 피아노와 함께 '노!'를 배워야 했던 이유

등록 2019.12.06 18: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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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국제 무대 데뷔 30주년

2018년부터 베토벤 소나타 전곡 프로젝트

8일 롯데콘서트홀 리사이틀

[서울=뉴시스] 백혜선. (사진 = Sangwook Lee 제공) 2019.12.06 realpaper7@newsis.com

[서울=뉴시스] 백혜선. (사진 = Sangwook Lee 제공) 2019.12.06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이재훈 기자 = "혜선 씨는 한 가지만 배우면 됩니다. '노!'라고 답하는 것. 사람이 '셀피시(selfish)'적인 것도 적당히 갖고 있어야죠."
 
'건반 위의 철학자'로 통하는 피아니스트 러셀 셔먼·변화경 부부가 제자인 피아니스트 백혜선(54)에게 건네준 조언이다.

백혜선은 예술가라고 하면 의례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에서 벗어나 있다. 예민하고 도도하기보다, 솔직하고 시원시원하다. 친근하게 말도 먼저 건네고 정도 많다.  

최근 한남동에서 만난 백혜선은 "제가 엄마라서 그런지 남에게 손해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커요. 선생 근성이 있어서 이런 저런 이야기도 많이 하죠"라며 웃었다.

백혜선은 최근 '제64회 대한민국예술원상'을 받았다. 탁월한 창작 활동으로 예술 발전에 공적을 세운 것에 대한 부분뿐 아니라 인격적인 면도 감안하는 상이다.

무엇보다 백혜선은 음악적으로 부지런하다. 내년 탄생 250주년을 맞는 베토벤을 몇 년 전부터 청중들이 기억하게 만들었다. 덕분에 클래식 팬들은 2020년을 경건하게 맞을 채비를 갖춰왔다.

2018-2020 시즌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 프로젝트가 그것이다. 협주곡도 나눠 연주하고 있다. 내년 뉴욕에서 협주곡을 연주하면 이 프로젝트의 마침표가 찍힌다. 8일 오후 5시 롯데콘서트홀에서는 베토벤 후기 소나타 28번, 31번, 32번을 연주한다.

올해 국제무대 데뷔 30주년을 맞는 백혜선의 초심을 떠올리게 하는 프로그램이다. 백혜선은 1989년 3년간 1위 우승자를 내지 못했던 메릴랜드 윌리엄 카펠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직후 기념으로 미국 뉴욕의 링컨 센터 앨리스 툴리홀에서 공연, 세계 무대에 데뷔했다. 당시 링컨 센터에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제28번을 연주했다. 국내에서도 예술의전당 첫 리사이틀에서 어김없이 이 곡을 연주했다.

백혜선은 소나타 28번에 대해 "죽었다가 살아나야 하는 곡"이라고 했다. "그 심오함에 대해 이루 말할 수 없죠. 영혼의 세계를 다루는데 한마디로 말하면 어둠과 빛이에요. 그 빛을 보기 위해, 모든 것을 끝내기 위해 통로를 거쳐야 하죠. 그런데 그 통로가 왜 그렇게 길게 느껴지는지. 그래서 4악장에서는 자유가 느껴지죠. 그런 의미에서 감정적이기 보다 정신적인 곡으로 봐요."

백혜선은 예전에도 이런 부분을 알았다. 하지만 주입식의 이해였다고 털어놓았다. "이번에는 저절로 느끼고 있다고 할까요. 이것을 표현하면 소용돌이처럼 걷잡을 수 없어집니다."
[인터뷰]백혜선, 피아노와 함께 '노!'를 배워야 했던 이유


백혜선이 앞서 지난 3일 부산문화회관에서 펼친 공연은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부산국제음악제와 백혜선의 국내 매니지먼트를 처음부터 수십 년간 담당한 매니저인 고(故) 이명아 대표의 1주기를 추모하는 자리였다.

두 사람은 단순히 아티스트와 매니저의 관계가 아니었다. 음악 파트너를 넘어 언니와 동생, 때로는 엄마와 딸의 관계였다. 어느새 백혜선은 먹먹해졌다. "이 대표님이 베푸신 사랑에 엄청난 은혜를 입었죠. 저는 '생떼'만 부린 것 같아 죄송해요. 저는 늘 뒤에 숨어 있었죠. 저를 보호해줄 사람이 있었던 사실이 엄청나게 좋았어요."

백혜선은 원조 피아노 스타다. 1965년 경북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예원학교 2학년 때 미국으로 건너갔다. 보스톤 윌넛힐 스쿨, 뉴 잉글랜드 음악원 학사, 석사, 아티스트 디플로마를 졸업했다.

리즈 콩쿠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 등 다수의 세계적 경연 대회에서 다수 입상하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피아니스트로 자리매김했다. 1994년 최연소 서울대 교수로 임용 당시 음악계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큰 관심사였다. 현재 미국 뉴 잉글랜드 음악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백혜선은 "처음 데뷔를 했을 때는 너무 세상을 몰랐어요. 너무 행운만 가득했죠"라고 돌아봤다. "서울대에 있을 때는 '병아리'였어요. 다른 곳을 향해 손가락질만 할 줄 알았지, 제 안의 잘못된 것을 보지 않으려고 했던 시기였어요."
 
그런데 올해 하버드대에 입학한 아들(원재), 그리고 딸(연재) 둘을 키우면서 정말 배운 것이 많았다고 했다. "가르친다는 의미, 선생님의 마음가짐이 어때야 하는지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거죠."

어려운 일도 두렵지 않게 됐다. "힘든 시간을 가져야만 더 많은 것을 공감할 수 있어요. 예술도 마찬가지죠. 베토벤을 연주하면서도 마찬가지에요. 감히 베토벤을 이해하거나 공감했다고는 말할 수 없죠. 다만 몸소 체험을 하면서 굉장히 깊고 큰 뜻을 접해가고 있는 거죠"라며 겸손해했다. 

백혜선은 일찌감치 넓게 그리고 멀리 내다보고 있었다. 10년 전부터 고향에 있는 대구가톨릭대학 석좌교수를 맡고 있는 것이 예다. 미국에 주로 적을 두고 있지만 한국 클래식계에 대한 애정, 고민도 여전히 지켜나가고 있다. 특히 서울에 쏠려 있는 구조를 어떻게든 분산시키고 싶은 마음이다. "지역 문화의 활성화는 우리 전체 문화의 지침서이기도 하죠. 지역에 관심을 갖는 것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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