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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구자경 LG 2대 회장은...25년간 LG 이끌며 260억→30조원대 매출 글로벌 기업 성장 이끌어

등록 2019.12.14 11: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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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창업 초기부터 구인회 창업회장 도와 LG일궈온 1.5세대 경영인

주력사업 화학 전자 등 수직계열화 이끌며 현재의 LG 기틀 마련

퇴임 이후 난 가꾸기·버섯 연구 등 자연과 함께한 '영원한 자유인'

[서울=뉴시스] 구자경 LG 명예회장. 사진 LG

[서울=뉴시스] 구자경 LG 명예회장. 사진 LG

[서울=뉴시스] 김종민 기자 = 구자경 명예회장은 구인회 창업회장의 뒤를 이어 1970년 1월부터 1995년 2월까지 만 25년 동안 LG의 2대 회장으로 재임했다. 대한민국의 작은 기업 LG를 세계적인 대기업으로 성장시킨 선장이자 조타수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1950년 LG의 모기업인 락희화학에 입사한 이래 20여 년간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경영 역량을 바탕으로 기술과 인재를 중시하였고, 필생의 업으로 여긴 경영혁신을 주도하며 자율경영을 정착시켰다. 더욱이 나름의 철학과 소신으로, 한창 원숙한 경지에 이른 70세에 은퇴의 용단을 내리고 젊은 세대에게 경영을 물려줬다.

14일 LG에 따르면, 구자경 LG 명예회장은 1925년 4월, 경상남도 진주에서 부친 연암 구인회와 모친 허을수의 6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구자경은 유림에서 존경받던 증조부 만회 구연호 공의 사랑과 외유내강형의 선비로 유교의 전통과 신문화의 합리적 사고를 함께 지녔던 조부 춘강 구재서 공의 가르침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형제간의 우애와 근검한 생활을 중요시하는 가통 속에서, 특히 장남으로서 집안의 중심 역할이 가져야 할 ‘책임감’과 가족의 모범이 되어야 할 ‘마음가짐’에 대한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다. 이렇게 자리 잡은 가치관은 경영활동에도 면면히 이어져 경영자로서 스스로에게 엄격함을 유지하는 한편, 항상 리더로서의 역할과 책임의식을 먼저 떠올렸다.

진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지수보통학교를 거쳐 부산사범대 부속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1950년, 부친의 부름을 받아 락희화학에 입사하여 서울의 화장품연구소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러나 뒤이어 발발한 6·25 동란으로 인해 연구 업무에 대한 아쉬움을 남긴 채 부산으로 내려오게 된다.

이후 구자경은 주로 생산현장에서 직원들과 고락을 함께 했다. 럭키크림 생산을 직접 담당하면서 손수 가마솥에 원료를 붓고 불을 지펴 크림을 만들었고, 박스에 일일이 제품을 넣어 포장해 판매현장에 들고 나갔다. 하루걸러 숙직을 하며 새벽부터 몰려오는 도매상들을 맞았고,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에 공장가동을 준비했다. 판자를 잇댄 벽에 깡통을 펴 지붕을 덮은 공장에서 숙직할 때면, 판자 사이로 들어온 모래바람 때문에 자고 나면 온몸이 모래투성이였다.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허름한 야전점퍼에 기름을 묻히고 다니는 모습이 영락없는 현장 근로자였다.

흔히 경영수업이라고 하면 영업이나 기획 분야, 해외지사에서 몇 년간 실무를 보다가 기획조정실장 등을 거쳐 경영자로 나가는 것이 익숙한 관행이다. 이에 반해 구자경은 십 수 년 공장생활을 하며 ‘공장 지킴이’로 불릴 만큼 현장 수련을 오래 했다. 사람들이 부친인 구인회 창업회장에게 “장남인데 너무한 거 아니냐”고 할 정도였으나, 구인회 창업회장은 “대장간에서는 하찮은 호미 한 자루 만드는 데도 무수한 담금질로 무쇠를 단련한다. 고생을 모르는 사람은 칼날 없는 칼이나 다를 게 없다”며 현장 수업을 고집했다.

[서울=뉴시스]

[서울=뉴시스]

구자경은 창업 초기부터 회사운영에 합류하여 부친인 구인회 창업회장을 도와 LG를 일궈온 1.5세대 경영인이다. 1950년대에서 196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LG는 부산의 부전동공장, 연지공장과 동래공장, 초읍공장, 온천동공장 등 생산시설을 연이어 확장하며 화장품, 플라스틱 가공 및 전자산업에서 국가 경제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해왔다.

구자경은 플라스틱 가공제품의 국내 최초 생산 현장은 물론, 금성사가 국내 최초로 라디오를 생산하는 과정도 직접 챙겼다. 이 땅에 화학공업과 전자사업이 탄생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현장에서 몸소 겪은 것이다. LG의 어느 공장이든 그의 손을 거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공장에 따라서는 어느 상자에 어떤 공구가 들어 있고, 누가 어떤 작업을 잘 하는지도 훤히 꿰고 있을 정도였다.

갑작스런 선친의 타계로 2대 회장의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은 구자경은 오랜 기간 현장에서 쌓은 역량과 자신감을 십분 발휘하여, ‘과연 거대한 그룹을 잘 이끌어 나갈 수 있을까’라는 주변의 우려를 무색하게 했다. 주력사업인 화학과 전자 부문은 부품소재 사업까지 영역을 확대해 원천 기술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수직계열화를 이루며 지금과 같은 LG의 모습을 갖출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25년간 회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LG의 매출은 260억 원에서 30조 원대로 성장했고, 종업원도 2만 명에서 10만 명으로 증가했다.

선친의 갑작스런 타계로 경영권 승계 준비에 대한 아쉬움이 있던 구자경 회장은 “70세가 되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날 것이다”라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그리고 실제로 70세가 되던 1995년 2월 장남 구본무에게 회장 자리를 물려주고 은퇴함으로써 재계 첫 무고(無故) 승계라는 의미 있는 선례를 만들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장남 구본무도 1975년부터 20년 동안 그룹 내 여러 현장을 두루 거치면서 후계자 수업을 받게 하였다. 변함없이 적용된 장자 승계 원칙과 혹독한 후계자 수업은 조용하면서도 안정적인 경영권 승계의 비결이었다. 

은퇴 후 구자경은 평소 갖고 있던 소박한 꿈이었던 분재와 난 가꾸기, 버섯 연구에 정성을 기울이는 등 회사생활 50년 만에 맞은 자유인의 삶을 자연 속에서 충실히 누리고 있다. 평소 생명이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스스로의 꿈을 향하여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신념을 피력하곤 했던 그는 이러한 생각을 실천하듯 경영자의 삶에서 은퇴한 이후 ‘영원한 자유인’으로 살아왔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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