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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정국 3년] 해방정국 3년… 사진에 담긴 환호와 좌절

등록 2020.01.05 06:00:00수정 2020.02.24 10: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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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분단 역사적 순간 희귀사진 중심 연재

남과 북서 따로 열린 일본 항복조인식 눈길


 

1.  연재를 시작하며

해방정국 3년의 역사적 경험은 오늘날 한반도가 당면한 문제를 풀어나가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과거의 실패를 성찰해야 현재의 과제를 파악할 수 있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광복 75주년을 맞아 새롭게 발굴된 사진과 문서를 중심으로 해방 직후 격동의 3년간을 매주 재조명해 본다. [편집자 주]
[서울=뉴시스]1945년 9월 9일 오후 4시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중앙청)에서 열린 종전협정에 대한 항복문서 조인식에서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대장, 조선군사령관 고즈키 요시오(上月良夫) 중장(왼쪽), 진해경비사령관 야마구치 기사부로(山口儀三郞) 제독(오른쪽)이 함께 참석해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사진=미국 국립문서보관청) 2020.01.05.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1945년 9월 9일 오후 4시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중앙청)에서 열린 종전협정에 대한 항복문서 조인식에서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대장, 조선군사령관 고즈키 요시오(上月良夫) 중장(왼쪽), 진해경비사령관 야마구치 기사부로(山口儀三郞) 제독(오른쪽)이 함께 참석해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사진=미국 국립문서보관청) 2020.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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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항복하자 거리마다 '독립행진곡' 울려퍼져

[서울=뉴시스] 1945년 9월 9일 오후 4시 여전히 일장기가 휘날리던 조선총독부 제1 회의실(중앙청)에서 연합군과 일본 측의 종전 협정에 대한 항복문서 조인식이 거행됐다. 먼저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대장, 조선군사령관 고즈키 요시오(上月良夫) 중장, 진해경비사령관 야마구치 기사부로(山口儀三郞) 제독이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연합국 측에서 태평양방면 제24군사령관 하지 중장과 태평양방면 해군사령관 킹커에드 대장이 서명했다. 서명식은 불과 25분 만에 끝났다.

[서울=뉴시스]1945년 9월 9일 오후 4시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중앙청)에서 열린 종전협정에 대한 항복문서 조인식에서 태평양 방면 제24군사령관 하지 중장(오른쪽)과 태평양방면 해군사령관 킹커에드 대장이 서명하고 있다. (사진=미국 국립문서보관청) 2020.01.05.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1945년 9월 9일 오후 4시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중앙청)에서 열린 종전협정에 대한 항복문서 조인식에서 태평양 방면 제24군사령관 하지 중장(오른쪽)과 태평양방면 해군사령관 킹커에드 대장이 서명하고 있다. (사진=미국 국립문서보관청) 2020.01.05. [email protected]

이보다 앞서 8월 26일 밤 평양 철도호텔에서 소련 제25군 사령관 이반 치스차코프(Ivan Chistyakov) 대장과 후루카와 가네히데(古川兼秀) 평안남도지사가 참석한 가운데 행정 이양 절차를 마무리 짓고, 다음날 소련군은 평양 사관구 사령관 다케시마 요시하루(竹下義晴) 중장과 만나 일본군 무장 해제 절차를 협의했다.

[서울=뉴시스]1945년 8월 26일 밤 평양 철도호텔에서 소련 제25군 사령관 이반 치스차코프(Ivan Chistyakov) 대장이 후루카와 가네히데(古川兼秀) 평안남도지사와 만나 행정 이양 절차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1.05.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1945년 8월 26일 밤 평양 철도호텔에서 소련 제25군 사령관 이반 치스차코프(Ivan Chistyakov) 대장이 후루카와 가네히데(古川兼秀) 평안남도지사와 만나 행정 이양 절차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1.05.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1945년 8월 27일경 소련 제25군 사령관 이반 치스차코프(Ivan Chistyakov) 대장이 평양주둔 사관구 사령관 다케시마 요시하루(竹下義晴) 중장과 일본군 무장해제 절차에 대해 협의하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1.05.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1945년 8월 27일경 소련 제25군 사령관 이반 치스차코프(Ivan Chistyakov) 대장이 평양주둔 사관구 사령관 다케시마 요시하루(竹下義晴) 중장과 일본군 무장해제 절차에 대해 협의하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1.05. [email protected]


소련군에 이어 미군이 38선 이남에서 항복조인식을 함으로써 한반도에서 공식적으로 일제 통치는 막을 내렸다. 남과 북의 민중은 36년 만에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며 환호했다.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길더니/ 삼천리 이 강산에 먼동이 텄네/ 동무야 자리 차고 일어나거라 산 넘어 바다 건너 태평양 넘어/ 아 아 자유의 자유의 종이 울린다” 박태원 작사, 김성태 작곡의 ‘독립행진곡’이 거리마다 울려 퍼졌다.

[서울=뉴시스]1946년 8월 26일 ‘소련군 환영대회’를 마친 평양 시민들이 트럭에 나눠 타고 평양 시내를 행진하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1.05.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1946년 8월 26일 ‘소련군 환영대회’를 마친 평양 시민들이 트럭에 나눠 타고 평양 시내를 행진하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1.05.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1945년 9월 9일 오후 서울에서 시민들이 조선총독부(중앙청) 앞에서 연합국 국기를 들고 미국과 일본의 항복문서 조인식 종료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미국 국립문서보관청) 2020.01.05.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1945년 9월 9일 오후 서울에서 시민들이 조선총독부(중앙청) 앞에서 연합국 국기를 들고 미국과 일본의 항복문서 조인식 종료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미국 국립문서보관청) 2020.01.05. [email protected]


그러나 일본의 항복문서 서명은 또 다른 질곡의 서막이었다. 일본군의 무장해제라는 명목으로 38선 이북에는 소련군이, 이남에는 미군이 진주했기 때문이다. 해방이 통일국가 수립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분단이 잉태되고 있었다.

-감격의 순간을 기록한 사진사들

[서울=뉴시스]1945년 9월 9일 조선총독부 건물에서 열린 일본의 항복문서 조인식장에 들어가 역사적인 장면을 찍고 있는 조선영화사 소속 최희연((가운데 창틀 위) 사진기자. (사진=미국 국립문서보관청) 2020.01.05.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1945년 9월 9일 조선총독부 건물에서 열린 일본의 항복문서 조인식장에 들어가 역사적인 장면을 찍고 있는 조선영화사 소속 최희연((가운데 창틀 위) 사진기자. (사진=미국 국립문서보관청) 2020.01.05. [email protected]


9월 9일 일본의 항복문서 조인식장에는 UP·AP통신 기자와 중국 측 기자 등 수십 명의 사진기자가 기쁨의 순간을 함께 했다. 그러나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최희연(崔禧淵, 당시 조선영화사 사진반원, 후에 경향신문 사진부장) 씨가 이 역사적인 순간을 카메라에 담았다(동영상은 양세웅 조선영화사 영화반원이 촬영).
현재 남아 있는 해방과 분단의 현장을 기록한 사진들의 대부분은 미군과 소련군에 소속돼 함께 들어온 기록 요원들이 찍은 것이다. 이들이 찍은 사진은 미국의 국립문서보관청, 러시아의 문서보관소 등에 여러 곳에 보관돼 있다. 이외에 공식 제출되지 않은 ‘B컷 사진’, 미군과 소련군 소속 군인들이 개인적으로 찍은 사진들이 일부 공개돼 있다.

[서울=뉴시스]1945년 9월 9일 조선총독부 건물에서 열린 일본의 항복문서 조인식장에 들어가 촬영하고 있는 조선영화사 소속 최희연 사진기자. (사진=미국 국립문서보관청) 2020.01.05.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1945년 9월 9일 조선총독부 건물에서 열린 일본의 항복문서 조인식장에 들어가 촬영하고 있는 조선영화사 소속 최희연 사진기자. (사진=미국 국립문서보관청) 2020.01.05. [email protected]


반면 한국인 사진사가 찍은 사진은 극히 드물다. 1945년 당시 웬만한 집 2채 값에 해당하는 카메라를 개인이 소장하기는 어렵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해방 초기 사진은 일제 말기 발행된 <매일신보>, <경성일보>에 소속돼 활동한 사진기자, 영화사 사진반에 소속된 사진사, 일제강점기 때 사진관을 운영하거나 사진작가로 활동한 사람들에 의해 남겨졌다. 1945년 말 <동아일보>를 비롯해 정식 사진기자를 채용한 신문사들이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기록 사진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한국 현대 보도사진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울=뉴시스]1945년 10월 20일 중앙청 앞에서 열린 서울시민 주최 연합군 환영대회에 취재 나온 사진기자들. 왼쪽부터 현일영(玄一榮), 최희연(崔禧淵) 조선영화사 사진기자(후에 경향신문 사진부장), 김정래 기자, 백운선 기자(후에 동아일보 사진부장), 임석제(林奭濟) 서울타임스 사진기자, 미상. 이 사진은 1945년 가을부터 1946년까지 근무했던 미군 종군 사진작가 오브라이언(Don O" Brien)이 찍은 것이다. (사진=미국 국립문서보관청) 2020.01.05.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1945년 10월 20일 중앙청 앞에서 열린 서울시민 주최 연합군 환영대회에 취재 나온 사진기자들. 왼쪽부터 현일영(玄一榮), 최희연(崔禧淵) 조선영화사 사진기자(후에 경향신문 사진부장), 김정래 기자, 백운선 기자(후에 동아일보 사진부장), 임석제(林奭濟) 서울타임스 사진기자, 미상. 이 사진은 1945년 가을부터 1946년까지 근무했던 미군 종군 사진작가 오브라이언(Don O" Brien)이 찍은 것이다. (사진=미국 국립문서보관청) [email protected]


해방과 분단의 격동 시대를 기록한 여러 사진가가 있다. 이들은 역사의 현장에서 목격자와 증언자가 되었고, 그 순간을 사진으로 남겼다. 해방의 감격과 함께 불어 닥친 정치적 이념 대립의 소용돌이를 기록한 사진들은 그 자체로 연구대상이다. 사진 한 장 한 장에 역사적 스토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올해로 광복 75년 이자 분단 75년이 된다. 지난 75년 동안 남과 북은 서로 다른 이념과 체제 속에서 각자의 길을 걸어왔다. 38선이 그어질 때만 해도 이렇게 분단이 오래 지속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1945년 8월 해방 이후 1948년 분단 정부가 남과 북에 들어서는 3년 동안 국제적인 역학관계, 국내의 정치적 갈등과 분열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한반도에서는 엄청난 격변이 이어졌다. 그리고 여전히 한반도는 분단을 끝내고 통일로 가기 위해서는 여전히 국제적 협력과 국내 갈등을 해소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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