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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정국 3년] 해방 믿지 못해… 군중은 하루뒤 거리로 쏟아졌다

등록 2020.01.12 06:00:00수정 2020.02.24 10: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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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부, 연합군 진주뒤 정치범 석방 제의

여운형이 일언지하 거절, 즉각 석방 주장

세종로에서 서울역까지 도로 인산인해

조선영화사, 그날의 감격 생생하게 기록

총독부, 연합국 진주 때까지 주인 행세


해방정국 3년의 역사적 경험은 오늘날 한반도가 당면한 문제를 풀어나가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과거의 실패를 성찰해야 현재의 과제를 파악할 수 있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광복 75주년을 맞아 새롭게 발굴된 사진과 문서를 중심으로 해방 직후 격동의 3년간을 매주 재조명해 본다. [편집자 주]

[서울=뉴시스] [광복 75주년] 해방정국 3년… 사진에 담긴 환호와 좌절



2. 해방의 기쁨

1945년 8월 16일, 아침부터 조선영화사 직원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9시 전에 촬영팀과 사진기자는 경성감옥(서대문형무소)으로 갔다. 9시부터 감옥에 수감돼 있는 정치범이 석방될 예정이었다. 형무소 앞에는 이미 많은 인파가 몰렸다. 수감자들이 풀려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독립문에서 서대문형무소에 이르는 길가는 오전부터 ‘혁명동지 환영’이라 쓴 깃발 등을 든 시민들로 붐볐다. 한 여성은 ‘축 권오직 김대봉 해방’이라고 쓴 초롱을 들고 있었다.

[서울=뉴시스]‘혁명동지 환영’이라고 급하게 쓴 깃발을 든 군중들이 서대문형무소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1.12.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혁명동지 환영’이라고 급하게 쓴 깃발을 든 군중들이 서대문형무소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email protected]


예정보다 늦은 오전 10시 형무소 문이 열리고 수감자들이 나와 환영 나온 인사들과 감격의 악수를 했다. 공식적인 권력 이양도 이뤄지지 않은 이른 시기에 이들이 석방될 수 있었던 것은 여운형의 막후교섭 덕분이었다. 이미 15일 오전 엔도 류사쿠(遠藤柳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으로부터 일본 항복 후 조선의 치안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았던 여운형은 연합군이 진주한 뒤 정치범을 석방하자는 총독부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하며 당일 석방을 주장했다고 한다.

 출감자와 환영인파는 서대문 사거리 쪽으로 내려와 ‘조선독립 만세’를 외쳤다. 석방된 독립운동가들을 선두로 한 군중의 만세 행렬은 종로까지 이어졌다. 조선영화사 촬영팀과 사진기자는 이 장면을 역사의 기록으로 남겼다. 해방 조선의 첫 페이지는 이렇게 하루 늦게 열렸다.

[서울=뉴시스]1945년 8월 16일 오전 서대문형무소에서 출감한 독립운동가들과 군중들이 ‘조선독립 만세’를 외치고 있다. (사진=뉴시스 DB) 2020.01.12.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1945년 8월 16일 오전 서대문형무소에서 출감한 독립운동가들과 군중들이 ‘조선독립 만세’를 외치고 있다. (사진=뉴시스 DB) 2020.01.12.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1945년 8월 16일 오후 여운형(빨간 원)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이 서울 계동 휘문중학교에 도착해 군중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전날 저녁 여운형 위원장은 계동의 2층 양옥집에서 건국동맹을 모체로 안재홍(安在鴻) 등과 함께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사진=뉴시스 DB) 2020.01.12.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1945년 8월 16일 오후 여운형(빨간 원)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이 서울 계동 휘문중학교에 도착해 군중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전날 저녁 여운형 위원장은 계동의 2층 양옥집에서 건국동맹을 모체로 안재홍(安在鴻) 등과 함께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사진=뉴시스 DB) 2020.01.12. [email protected]


-여운형 “민족 해방의 첫걸음을 내딪게 됐다”

촬영을 마친 조선영화사 촬영팀은 바쁘게 계동 휘문 중학교로 향했다. 오후 1시쯤 전날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발족한 여운형(呂運亨) 위원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매일신보>는 다음 날 “16일 오후 1시 부내 계동 휘문 중학교 운동장에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수반인 여운형이 나타나 5000여 군중 앞에서 해방의 제일성을 힘있게 외쳤다”라고 보도했다.

약 20여 분 동안 여운형의 연설이 이어졌다.

“우리 민족 해방의 첫걸음을 내디디게 되었으니 우리가 지난날에 아프고 쓰렸던 것은 이 자리에서 모두 잊어버리자. 그리하여 이 땅을 참으로 합리적인 이상적 낙원으로 건설하여야 한다. 이때 개인의 영웅주의는 단연코 없애고 끝까지 집단적 일사불란의 단결로 나아가자.”

대중연설에 일가견이 있는 여운형의 격정적인 연설 장면과 이를 경청하는 군중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촬영기에 담겼다.

[서울=뉴시스]1945년 8월 16일 여운형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이 5천여 군중 앞에서 단결을 호소하며 사자후를 토하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1.12.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1945년 8월 16일 여운형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이 5천여 군중 앞에서 단결을 호소하며 사자후를 토하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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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연설이 끝나자 군중들은 종로통을 행진해 서울역으로 향했다. 서울역에 소련군이 들어온다는 낭설이 유포됐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일부 군중은 이미 ‘소軍(군) 歡迎(환영)’이라고 적힌 플래카드까지 들고 있었다.

[서울=뉴시스]1945년 8월 16일 오후 ‘축 해방’, ‘민주정권수립’ 등 현수막을 들은 군중들이 환호하며 서울 시내를 행진하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1.12.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1945년 8월 16일 오후 ‘축 해방’, ‘민주정권수립’ 등 현수막을 들은 군중들이 환호하며 서울 시내를 행진하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1.12.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1945년 8월 16일 오후 서대문, 종로 거리에서 행진한 군중들이 서울역 앞에 집결한 모습. ‘소군 환영’이라고 쓴 현수막이 보인다. (사진=미국 국립문서보관청) 2020.01.11.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1945년 8월 16일 오후 서대문, 종로 거리에서 행진한 군중들이 서울역 앞에 집결한 모습. ‘소군 환영’이라고 쓴 현수막이 보인다. (사진=미국 국립문서보관청) [email protected]


서울 거리는 해방의 기쁨을 한껏 안은 시민들로 넘쳐났다. 누군가가 만세를 선창하자, 화답하는 만세 소리가 메아리처럼 되돌아왔다. 행렬에 행렬이 이어졌다. 전날 밤 동대문 밖 창신동 최익한(崔益翰)의 집에서 ‘고려공산당’(이른바 장안파공산당) 재건을 선포한 일부 좌파인사를 중심으로 종로1가 화신백화점 옆 장안빌딩 2층에서 ‘출옥자 환영대회 및 재경 혁명자대회’를 가질 예정이었지만 청중이 너무 몰려 무산됐다. 세종로에서 서울역까지 도로는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서울=뉴시스]1945년 8월 16일 ‘우리 정권수립’, ‘축 해방’, ‘우리 조선 우리 정권’ 등의 현수막을 들은 군중들이 서울역 앞 광장에 서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1.12.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1945년 8월 16일 ‘우리 정권수립’, ‘축 해방’, ‘우리 조선 우리 정권’ 등의 현수막을 들은 군중들이 서울역 앞 광장에 서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1.12. [email protected]


-8월 16일 현장을 기록한 조선영화사

그 인파 사이에 조선영화사 사진기자 최희연((崔禧淵)도 있었다. 그는 1932년 조선일보 사진부에 입사해 1937년 경성일보 사진부로 옮겼다가 1941년부터 조선영화사 사진부 주임으로 활동했다. 그는 해방 후에도 조선영화사에 근무 중이었다.

그는 ‘축 해방’, ‘우리 조선 우리 정권’, ‘우리 정권 수립’ 등의 펼침막을 들고 행진하는 군중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그리고 서울역 귀빈실 2층 옥상에 올라갔다. 서울역과 남대문로를 가득 메운 군중들을 찍기 위해서였다. 최인진 사진역사박물관 소장이 정리한 구술 테이프에서 최희연은 “그 사진은 서울역에서 내가 서울역 귀빈실 2층 옥상에 올라가서 남대문을 향해서 참 시커멓게 군중들이 나와 있는 사진, <국제보도>에 나와 있는 사진을 내가 찍었다. ‘해방’이라고 나온 사진도 <국제보도>에 나와 있다”라고 증언했다. 그 2장의 사진 외에도 8월 16일 서울시민의 감격을 담은 사진은 대부분 그가 찍었을 가능성이 크다.

[서울=뉴시스]1945년 8월 16일 오후 조선영화사 최희연 사진기자가 서울역 귀빈실 2층 옥상에 올라가서 찍은 사진. 군중들이 태극기를 들고 건물에 올라가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 사진은 <국제보도> 창간호에 ‘해방의 날’이란 제목으로 게재됐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1.12.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1945년 8월 16일 오후 조선영화사 최희연 사진기자가 서울역 귀빈실 2층 옥상에 올라가서 찍은 사진. 군중들이 태극기를 들고 건물에 올라가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 사진은 <국제보도> 창간호에 ‘해방의 날’이란 제목으로 게재됐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1.12. [email protected]


전날 정오 일본 천왕의 방송이 있었지만 정작 그날 서울 시내는 조용했다. 그러나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군중들은 비로소 해방의 기쁨을 만끽했다. 당시 서울 주재 소련 영사 샤브신의 부인 피냐 샤브시나는 그날을 이렇게 기록했다.

“8월 15일 서울은 마치 쥐 죽은 듯 고요하였다. 시민들은 일본의 항복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냥 기다렸다. 기쁨과 희망의 감정을 억누르면서. 그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그러나 다음 날 모든 것이 바뀌었다. 환희에 가득 찬 사람들의 거대한 물결이 온 시내, 온 나라를 뒤덮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텅 비고 조용하기만 하였던 서울. 수많은 사람이 파도처럼 광장과 거리와 골목을 가득 메웠다. 끝없는 흰 바다가 흔들리며 들끓는 듯했다.”

일본 경찰들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그렇게 해방의 환희를 만끽했다. 오후 3시 10분부터 약 20분 동안 안재홍(安在鴻)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은 경성중앙방송을 통해 해방의 기쁨을 전하면서 국민들의 자중을 당부하는 연설을 했다. 다음날 <매일신보>는 1면 머리기사로 ‘호애(互愛)의 정신으로 결합, 우리 광명을 맞자, 3천만에 건국준비위원회 제1성’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방송내용을 소개했다.

[서울=뉴시스]1945년 8월 16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위원장 여운형) 명의로 서울 시내에 뿌려진 전단. 경거망동하지 말고 자중과 안정할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1.12.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1945년 8월 16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위원장 여운형) 명의로 서울 시내에 뿌려진 전단. 경거망동하지 말고 자중과 안정할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email protected]


이를 계기로 해방 소식은 지방 각지로 퍼져나갔다. 이어서 전국 곳곳에 건국준비위원회 지부들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서울=뉴시스]일본이 항복하고 평화가 찾아왔다는 내용의 1945년 8월 15일자 미군 신문.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1.12.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일본이 항복하고 평화가 찾아왔다는 내용의 1945년 8월 15일자 미군 신문.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email protected]


그러나 해방의 환희는 오래가지 않았다. 소련군의 서울 진주를 예상해 여운형에게 치안권을 약속한 조선총독부는 이날 미군이 진주한다는 사실을 알고 조선군관구 사령부를 통해 “민심을 교란하거나 치안 질서를 해치는 일은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란 내용의 포고문을 냈다. 이틀 후인 8월 18일 이범석, 장준하, 김준엽, 노능서 등 4명의 광복군 요원이 비행기로 경성비행장(여의도)에 도착했지만 “아무런 지시가 없으니 돌아가라”는 일본군의 협박에 침통한 얼굴로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일제는 항복했지만, 미군과 소련을 주축으로 하는 연합국이 진주하기 전까지 조선총독부는 여전히 한반도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8월 16일 누린 해방의 기쁨은 첫걸음에 불과했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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