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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즈업 필름]캐스팅은 메시지다…'인질'

등록 2021.08.22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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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영화 '1917'의 한 장면.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영화 '1917'의 한 장면.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손정빈 기자 = 지난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경쟁했던 샘 멘데스 감독의 영화 '1917'에는 독특한 지점이 있었다. 보통의 영화가 주요 배역을 스타 배우로 채우고, 그 외 중요하지 않은 역할을 잘 알려지지 않은 배우에게 맡기는 것과 정반대 캐스팅을 한 것이다.

이 영화는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두 병사가 중요한 군사 전략을 담은 메시지를 목숨을 걸고 전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주인공은 당연히 메신저 역할을 맡은 병사 '블레이크'와 '스코필드'다. 그런데 이 역할을 맡은 건 각각 무명에 가까운 배우 조지 매카이와 딘 찰스 채프먼이었다.

반면 블레이크와 스코필드가 전장(戰場)에서 매우 짧은 시간 마주치는 4명의 지휘관 배역은 이른바 영국의 슈퍼스타로 불리는 배우들이 한 자리씩 차지했다. 콜린 퍼스, 마크 스트롱, 베네딕트 컴버배치, 리처든 매든. 러닝타임 120분 중 이들의 출연 시간은 모두 합쳐 10분 남짓이었다.

물론 이 이상한 캐스팅엔 이유가 있었다. 멘데스 감독이 주목한 건 대규모 작전을 지휘해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전쟁 영웅이 아니라 그 지시에 따라 움직이며 스러져간 수많은 무명 용사였다. 다시 말해 전령을 보내 작전을 변경한다는 계획을 세운 건 장군이지만, 그 계획을 가능하게 한 건 임무를 묵묵히 수행한 졸병이었다.

만약 일개 병사 역할을 대중에 널리 알려진 유명 배우에게 맡겼다면 관객은 이 작품에서 리얼리티를 느끼기 어려웠을 것이고, 그랬다면 이 영화의 메시지 역시 흐릿해졌을지 모른다. 모두가 얼굴을 아는 무명(無名) 용사라는 말은 형용 모순이니까.

분량이 매우 적은 지휘관 역에 스타 배우를 넣어놓은 건 카메오라는 재미를 위해서가 아니다. 이 영화가 널리 알려진 영웅이 아닌 보통의 군인을 조명한다는 걸 더 명확히 드러내는 전략이다. 캐스팅은 이렇게 그것 자체로 영화의 메시지가 되기도 한다.

'1917'엔 이 의도가 드러나는 장면이 있다. 블레이크와 스코필드는 메시지를 전하러 가는 길에 나무 한 그루를 본다. 그 나무엔 꽃이 피었다. 블레이크는 그게 체리 나무라고 말한다. "램버트 체리야. 듀크 같기도 하고. 열매가 없어서 모르겠네." 뭐가 다르냐는 스코필드의 질문에 블레이크는 답한다. "사람들은 한 종류인 줄 알지만, 종류가 많아. 커스버트, 퀸 앤, 몽모랑시, 달콤한 거, 시큼한 거."
[클로즈업 필름]캐스팅은 메시지다…'인질'

지난 18일 개봉한 필감성 감독의 '인질'은 '1917'처럼 캐스팅 전략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이 영화는 '1000만 배우 황정민이 괴한에 납치당한다'는 독특한 설정을 하고 있다. '황정민' 역할을 실제로 배우 황정민이 맡아 화제가 되고 있다. 황정민은 '황정민'을 연기하며 "드루와, 드루와" 등 유행어를 다시 한번 선사한다.

흥미로운 건 이 작품에 스타 배우라고 할 만한 연기자가 황정민 외에 단 한 명도 없다는 점이다. 황정민을 납치하는 일당 5명을 연기한 배우 중 일반 관객이 얼굴을 알 만한 배우는 없다. '황정민 납치 사건' 해결에 나선 경찰을 연기한 배우 역시 모두 무명이다. 익숙한 느낌을 주는 얼굴조차 찾기 힘들다.

이 캐스팅은 의도적이다. '인질'은 배우 황정민이 납치됐다는 다소 유치해 보일 수 있는 가정을 관객이 믿게 하는 게 중요한 영화다. 이 설득이 실패하면 당연히 관객이 영화에 몰입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해 중요한 건 역시 리얼리티다.

만약 실제로 황정민이 납치됐다고 가정하면, 매우 당연하게도 사람들은 황정민의 얼굴은 알아도 황정민을 납치한 이들이라든가 이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의 얼굴은 전혀 알지 못할 것이다. 필감성 감독은 이같은 현실 상황을 영화에 그대로 적용했다. 그래서 황정민 외에 모든 배우는 관객이 알지 못하는 배우여야 했다.

이 캐스팅으로 언뜻 당연해보이지만, 실현하기는 쉽지 않다는 점에서 평가할 만하다. '인질'은 오락성에 무게를 둔 작품이다. 많은 관객을 끌어모으는 게 중요하다. 물론 황정민이 국내 최고 흥행 배우인 건 맞지만 여기에 힘을 보태줄 수 있는 유명 배우 한두 명이 더 있다면 한결 수월하게 일정 규모 이상 관객을 동원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제작진은 리얼리티를 위해 이를 과감하게 포기했다.

물론 이 영화는 신인 감독의 첫 연출작이라는 점 때문에 제작비 문제로 황정민 외에 다른 스타 배우를 섭외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다만 그 과정과 무관하게 캐스팅만으로 관객을 설득한다는 게 최근 한국영화계에서 보기 힘든 시도였다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게 '인질'은 개봉 이후 줄곧 박스오피스 정상을 달리고 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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