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이스북
  • 트위터
  • 유튜브

광장

"이태원 핼러윈 참사는 각자도생하라는 메시지"

"하늘이 보이는 실외에서 사람들이 갇혀서 사망했다는데, 납득이 안 됐어요. 그런데 이후에 뉴스에서 나오는 얘기들은 전혀 새롭지 않더라고요. '안전 대책이 없었다', '경찰이 안일하게 대처했다', '정부의 사과는 없었다'. 세월호 참사 때는 세상이 정의롭지 않다고 느껴 화가 났었는데, 이번에는 '전혀 바뀐 것이 없었구나' 싶었죠. 무력감, 공허함이 들었어요." 세월호 참사 발생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김건수(26)씨는 직장 행사를 마친 후 동료들과 뒷풀이를 하던 중 TV 속보로 그날 이태원을 봤다. 속보가 이어지는데, 실외 압사라는 보도를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김씨는 "참사가 벌어졌고, 계속 반복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그날 하루가 멍했다"고 했다. 그날 이태원에서 사라진 생명 156명 가운데 104명이 20대 청년들이었다. 2014년, 김씨는 자기보다 1년 아래인 단원고 2학년생들이 세월호라는 큰 배에 갇혀 나오지 못하는 모습을 봤다. 8년이 지났고, 김씨는 또다시 또래들이 이태원에서 희생되는 모습을 봤다. 뉴시스는 지난 3일 이른바 '재난 세대'라고 부를 수 있는 1996년~1999년생 청년 5명을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났다. 박준우(26·세월호 당시 고3)씨, 문수영(25·세월호 당시 고2)씨, 김건수(26·세월호 당시 고3)씨, 유채연(24·세월호 당시 고1)씨, 이강(23·세월호 당시 중3)씨다. 이들에게 세월호는 어떤 기억으로 남았고, 이태원은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 ◆세월호 세대가 본 이태원 (박) "집에서 뉴스로 처음 접했다. 새벽 4시까지 특보를 봤는데 감정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무엇보다 비현실적이었다. 영화 같은 데서 보는 사고 같았다." (문) "당시 오후 11시부터 팀별 과제를 하고 있어서 실시간으로 (뉴스를) 다 봤다. 사람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걸러지지 않은 사진들이 많이 올라왔다. 영상을 보고 너무 힘들었다. 친구들이 걱정돼 전화도 걸며 밤을 통째로 다 샜다." (유) "사망 속보가 뜨기 시작하더니 숫자가 계속 커지더라. 100명이 넘어가면서는 현실감이 없었다. 서울 한복판에서 이렇게 죽을 수 있나. 21세기에. 아직도 현실감이 없다." (이) "친구랑 혜화동에서 술을 마시다가 친구들이랑 부모님께 연락이 와서 알게 됐다. 평소에 이태원을 자주 간다. 그날도 처음엔 친구랑 이태원에 가려고 했었는데, 친구가 사람이 너무 많을 것 같아 꺼렸다. 2018년도에는 이태원 핼러윈 파티에 갔었다. 내게도 얼마든지 닥칠 수 있는 일이었는데 (이태원이 아니어서) 살았던 것뿐이다." ◆우리에게 안전은 '셀프' (유) "(세월호 참사가) 뚜렷하게 기억난다. 국어 1교시 수업 중에 (뉴스) 화면을 보여주는데 (구조됐다는 뉴스가 나오고) 다시 수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점심을 먹고 오니 상황이 바뀌어 '몇백 명이 배 안에서 살아나오지 못할 것 같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었다. 그때 느낀 감정도 당혹이었고, 이번에 느낀 감정도 당혹감이었다. 사건 자체가 비일상적이었기 때문에." (문) "어렸던 그때는 바다가 어떤지도 모르고 진도가 어딘지도 모르니까 현실감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배만 안 타고, 수학여행만 가지 않으면 된다고도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태원은 회사랑도, 집이랑도 너무 가깝고 지금도 갈 수 있는 곳이다. 현실적이어서 오히려 비현실적이다." (김) "세월호 참사 때는 왜 학생들을 구하지 못했는지 이해가 안 됐다. 그러나 이번에는 경찰이 안일했고 안전 대책도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탈하고 공허했다. 뉴스에서 나오는 얘기가 전혀 새롭지 않았고, 안전 대책이 없었다는 걸 보면서 세월호 당시와 전혀 바뀐 게 없다고 생각했다. 체념했다." ◆두 번의 참사와 팬데믹을 겪은 세대 (문) (재난사고에 대한) 무서움, 두려움은 높아졌다. 빨래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알바생 단톡방에서 '소화기를 매장 내 어디에 배치하면 되나요'라고 물었더니 '아무 곳에나 잘 보이는 곳에 두라'고 하더라. 안전 매뉴얼이 있을 텐데 그거대로 알려달라고 재차 요구해야 했다. 안전은 셀프다. 언론에선 '압사 위험이 있으면 어떤 자세를 취하라'는 설명이 나오더라. 퇴근길 지하철에서 사람들이 끼어 타면 소리를 질러서 (내가 깔리고 있음을) 알려야 한다고 하더라." (박) "세월호 참사 이후 국민 안전의 달을 만들겠다는 등 안전에 대한 경각심 가져야 한다는 목소리는 늘어났다. 그러면서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 사회가 안전하게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 사건으로 그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한국 사회가 안전해졌다는 데에) 체념하게 되는 사건이 아닐까." (유) "(112 신고가) 11차례 들어왔는데 경찰은 4번 출동했고, 제대로 된 대처가 없었다고 한다.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는 닮아있다. 정부의 대처 미흡, 예견된 참사, 막을 수 있었다." ◆재난의 일상화…'각자도생'이 유행어 (유) "나 스스로를 지켜야겠다는 메시지가 강해진 것 같다. 세월호에서 '나오지 말고 안에서 대기하라'는 안내방송이 있었다. (이태원 참사 이후에는) '압사가 우려되는 상황에선 팔꿈치를 앞으로 내밀어야 한다'는 안전대책을 공유하고 있더라. 개인이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고,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잃어가는 것 같다." (김) "어릴 때부터 무한경쟁을 학습했고 그게 유일한 윤리처럼 자리 잡은 것 같다. 지금의 청년들을 보고 개인주의가 심하다고 하는데, 한국 사회의 살아남는 방식이 달라진 게 아닐까. 집단적 연대보다는 각자도생 쪽으로." (문) "(국회 국민동의청원에는 세금으로 유족들을 지원하면 안 된다는 반대 청원도 올라왔다는데?) 그게 다음 참사의 징후다. 그런 반응이 나온 것조차도 사회적 문제다. 세월호 때도 '놀러 가다가 죽은 아이들'이라는 프레임이 있었다. 이번 참사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면 참사는 또 반복된다. 왜 '놀러 갔다가 죽었다'는 말을 하는 걸까. 일하다가 죽으면 괜찮은 건가." (김) "국가가 책임을 인정하고 어느 정도로 책임질지 논의하면 된다. 돈으로 가족을 잃은 상처를 치유할 수 있나. 공정이란 키워드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국가가 그 유족에게 돈을 지급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나도 보호해줘야지'로 해석된다. 국가의 부재 속에서 국민들이 싸우고 있는 거 아닌가." ◆우리는 이태원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김) "'나 위험해', '나 도움이 필요해'라고 말했을 때 들어줄 수 있는 사회적 역량이 중요하다.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어렵다고 말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나. 그 목소리가 우리 사회에서 잘 소화됐을까. 참사도 똑같다고 생각한다. 위험을 먼저 감지하는 완벽한 시스템은 없을 거다. 그 목소리를 잘 들을 수 있는 역량을 기르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문) "공권력이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게 애도 아닐까. 이게 무슨 일인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인데, 알려주는 게 필요하다." (이) "애도는 기본적으로 기억이다. 애도의 최선은 기억이다. 지겹다고 얘기하지 않는 것, 피로해 하지도 않는 것."

임철휘 기자 | 김래현 기자 | 구동완 기자

구독
구독
기사제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