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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기록한 이땅의 혼혈인들, 이재갑 '빌린 박씨'전

등록 2018.09.07 06: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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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린 박씨'. 1994년 9월 경기 양평의 이른 새벽, 비닐하우스와 주변 논밭을 둘러보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하는 박근식씨. 어린 조카는 신이 났다.

'빌린 박씨'. 1994년 9월 경기 양평의 이른 새벽, 비닐하우스와 주변 논밭을 둘러보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하는 박근식씨. 어린 조카는 신이 났다.

【서울=뉴시스】 조수정 기자 = 사진가 이재갑(52)이 11일 서울 청운동 갤러리 류가헌에서 혼혈인에 대한 사진 보고서 ‘빌린 박씨’전을 연다. ‘뿌리(本)를 빌린’, 어느 남자의 이야기다.

 주민등록상 이름은 박근식이다. 그러나 ‘피터’라고 더 자주 불렸다. 피터는 1970년 초여름, 서울행 완행열차에서 ‘발견’됐다. 수십 알의 수면제를 삼키고 쓰러진 그의 양복 안주머니에는 대통령에게 보내는 진정서가 들어있었다. 혼혈인으로서의 삶에 대한 절규와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1992년 10월 서울 장안동. 박근식(40) 회원이 한국혼혈인협회 사무실 앞에서 장난스런 표정을 짓고 있다.

1992년 10월 서울 장안동. 박근식(40) 회원이 한국혼혈인협회 사무실 앞에서 장난스런 표정을 짓고 있다.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이 혼혈 청년의 자살기도는 처음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혼혈인’의 존재를 생각하게 했다. 전국 신문지면에 박근식이라는 이름이 올랐고, 그동안 한국 사회의 구석진 곳에 응달처럼 드리워져 있던 혼혈인 문제도 함께 떠올랐다. 혼혈인 처우개선을 위한 재단과 교육시설이 만들어지고 일정 교육기간이 지나면 미국으로 갈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등이 마련되기까지, 그 시작점에 ‘박근식’이라는 인물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관습대로라면 성씨를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아야 했지만, 근식은 어머니의 성인 밀양박씨를 성으로 삼았다. 6.25동란 직후에 태어난 그에게, 아버지는 ‘미군’이라는 풍문으로만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자신은 “밀양 박씨가 아니라 빌린 박씨”라고 말하곤 했다.
1993년 6월 경기 양평. 청주로 귀촌해 소를 키웠다. 혼혈인이 자립해서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 농장의 꿈은 이 무렵 싹텄다.

1993년 6월 경기 양평. 청주로 귀촌해 소를 키웠다. 혼혈인이 자립해서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 농장의 꿈은 이 무렵 싹텄다.

이재갑은 어머니의 성씨를 ‘빌려왔다’고 말하며 웃던 박근식의 얼굴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평생을 한국에서,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면서 살아온 박근식이 ‘빌림’의 의미를 모를 리 없으니 ‘빌린 박씨’라는 말 만으로도 이땅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떠돌아야 한 그의 삶을 짐작할 수 있다.
1993년 8월 경기 양평. 후배들을 만났다. 나이가 들어 활동이 어려워질 때를 대비해 혼혈인전문 요양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1993년 8월 경기 양평. 후배들을 만났다. 나이가 들어 활동이 어려워질 때를 대비해 혼혈인전문 요양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빌린 박씨’를 중심으로 혼혈인에 관한 기록 작업을 이어 온 이재갑은 ‘불편한 역사를 드러내 보여주는 치열한 리얼리즘의 사진가’로 불린다. 조선인 강제징용, 경산 코발트 광산의 민간인 학살 등 한국 근현대사의 아프고 불편한 기억들을 사진으로 기록해왔다. 이런 그가 가장 오랫동안 지속한 작업이 ‘혼혈인-내 안의 또 다른 초상’(1997), ‘또 하나의 한국인’(2005) 등 6.25 이후 태어난 혼혈인 세대들에 대한 다큐멘터리 사진 작업이다. 혼혈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와 시대의 아픔이요, 사회가 함께 풀어가야 할 과제라는 소명감이 1992년부터 30여년을 이 작업에 천착케 했다.

 1998년 2월 경기 양평. 방송 촬영을 위해 찾아갔다. 만난 지 6년째 되던 무렵이다. 그때 PD는 “이재갑 씨는 어떻습니까”하고 물었다. 박근식씨는 이렇게 답했다. “좋아는 하지만 아직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1998년 2월 경기 양평. 방송 촬영을 위해 찾아갔다. 만난 지 6년째 되던 무렵이다. 그때 PD는 “이재갑 씨는 어떻습니까”하고 물었다. 박근식씨는 이렇게 답했다. “좋아는 하지만 아직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혼혈인’은 광복 이후 전쟁과 미군 주둔의 시대상황에서 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 외모와 피부색이 다르게 태어난 아이들을 가리킨다. 사회는 눈에 띄는 외모의 그들을 차별의 손쉬운 표적으로 삼았다. 순혈주의다. 심지어 전쟁과 미군주둔이라는 역사적 배경이나 개별적인 진실은 보려하지 않고, 혼혈인과 그의 어머니들 모두를 ‘기지촌 여성과 자녀’로 분리했다.

처음에는 수만 명에 달한 혼혈인들이 냉대와 무관심 속에 대부분 한국을 떠나갔다. 전쟁고아들과 함께 수많은 혼혈아동들이 해외로 입양 보내졌고, 어릴 때 입양되지 못하고 한국에서 성장한 혼혈인들도 1982년 미국에서 특별이민법이 통과되자 미국으로 떠났다.

2006년 1월 TV 시사프로그램에 출연, 혼혈인의 인권 및 처우, 일상을 이야기했다.

2006년 1월 TV 시사프로그램에 출연, 혼혈인의 인권 및 처우, 일상을 이야기했다.

저마다의 사연으로 떠나지 못한 1000여 혼혈인들은 노환과 질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있다. 박근식도 2009년 지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목숨을 살라서라도 알리고자 했던 70년 초여름 그날의 일은 어느 하루의 결기가 아니었다. 자신이 미군에 의해 태어났듯, 수많은 혼혈인의 어머니들도 전쟁과 시대의 희생자였음을 알리고자 했다.

정식 인가조차 내주려 하지 않는 ‘한국혼혈인협회’ 회장을 역임하며 일평생을 혼혈인을 왜곡하고 문제를 축소하기에 급급했던 국가를 상대로, 혼혈인들을 부끄러운 ‘전쟁의 부산물’로 여기는 사회를 상대로 끊임없이 생을 살랐다. 자립 농장을 만들어, 사회로부터 배척 당해온 혼혈인들이 독자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를 꿈꾸기도 했다. 스무 살 자살 이후의 생 40년이, 다시금 수없이 잘게 나눠 자신을 죽이는 방식으로 항거하는 삶이었던 것이다.

2009년 1월 경기 양평. 간이 비닐하우스를 만들고 있다.

2009년 1월 경기 양평. 간이 비닐하우스를 만들고 있다.

이재갑 사진전 ‘빌린 박씨’는 이제는 고인이 된 혼혈인 1세대 박근식의 삶을 통해 이땅에 살았던 수많은 ‘빌린 박씨’들을 소환한다. 오도된 채로 역사 속에서 사라져간 그들을 마주함으로써 새롭게 앞으로 나아가는 성찰을, 사진의 힘을 빌려 해보려는 것이다.

박근식의 장례식 영정 앞에서 사진가 이재갑은 약속했다. 당신은 이 땅을 떠났어도 남겨진 사진을 통해 당신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겠다고.

 2009년 1월 경기 양평. 혼혈인협회 사람들과 동생들이 생일을 맞이한 형님 집을 찾았다. 이것이 마지막 생일상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2009년 1월 경기 양평. 혼혈인협회 사람들과 동생들이 생일을 맞이한 형님 집을 찾았다. 이것이 마지막 생일상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전시 개막식은 11일 오후 6시, 작가와의 만남은 25일 오후 4시다. 30일까지 오전 11시~오후 6시에 볼 수 있다. 월요일은 휴관한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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