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기록한 이땅의 혼혈인들, 이재갑 '빌린 박씨'전
'빌린 박씨'. 1994년 9월 경기 양평의 이른 새벽, 비닐하우스와 주변 논밭을 둘러보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하는 박근식씨. 어린 조카는 신이 났다.
주민등록상 이름은 박근식이다. 그러나 ‘피터’라고 더 자주 불렸다. 피터는 1970년 초여름, 서울행 완행열차에서 ‘발견’됐다. 수십 알의 수면제를 삼키고 쓰러진 그의 양복 안주머니에는 대통령에게 보내는 진정서가 들어있었다. 혼혈인으로서의 삶에 대한 절규와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1992년 10월 서울 장안동. 박근식(40) 회원이 한국혼혈인협회 사무실 앞에서 장난스런 표정을 짓고 있다.
우리나라의 관습대로라면 성씨를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아야 했지만, 근식은 어머니의 성인 밀양박씨를 성으로 삼았다. 6.25동란 직후에 태어난 그에게, 아버지는 ‘미군’이라는 풍문으로만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자신은 “밀양 박씨가 아니라 빌린 박씨”라고 말하곤 했다.
1993년 6월 경기 양평. 청주로 귀촌해 소를 키웠다. 혼혈인이 자립해서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 농장의 꿈은 이 무렵 싹텄다.
1993년 8월 경기 양평. 후배들을 만났다. 나이가 들어 활동이 어려워질 때를 대비해 혼혈인전문 요양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1998년 2월 경기 양평. 방송 촬영을 위해 찾아갔다. 만난 지 6년째 되던 무렵이다. 그때 PD는 “이재갑 씨는 어떻습니까”하고 물었다. 박근식씨는 이렇게 답했다. “좋아는 하지만 아직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처음에는 수만 명에 달한 혼혈인들이 냉대와 무관심 속에 대부분 한국을 떠나갔다. 전쟁고아들과 함께 수많은 혼혈아동들이 해외로 입양 보내졌고, 어릴 때 입양되지 못하고 한국에서 성장한 혼혈인들도 1982년 미국에서 특별이민법이 통과되자 미국으로 떠났다.
2006년 1월 TV 시사프로그램에 출연, 혼혈인의 인권 및 처우, 일상을 이야기했다.
정식 인가조차 내주려 하지 않는 ‘한국혼혈인협회’ 회장을 역임하며 일평생을 혼혈인을 왜곡하고 문제를 축소하기에 급급했던 국가를 상대로, 혼혈인들을 부끄러운 ‘전쟁의 부산물’로 여기는 사회를 상대로 끊임없이 생을 살랐다. 자립 농장을 만들어, 사회로부터 배척 당해온 혼혈인들이 독자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를 꿈꾸기도 했다. 스무 살 자살 이후의 생 40년이, 다시금 수없이 잘게 나눠 자신을 죽이는 방식으로 항거하는 삶이었던 것이다.
2009년 1월 경기 양평. 간이 비닐하우스를 만들고 있다.
박근식의 장례식 영정 앞에서 사진가 이재갑은 약속했다. 당신은 이 땅을 떠났어도 남겨진 사진을 통해 당신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겠다고.
2009년 1월 경기 양평. 혼혈인협회 사람들과 동생들이 생일을 맞이한 형님 집을 찾았다. 이것이 마지막 생일상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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