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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생각]국회의원의 말, 사나워지면 민주주의는 위험

등록 2020.09.23 15: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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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박상훈 국회미래연구원 초빙연구위원

[서울=뉴시스]박상훈 국회미래연구원 초빙연구위원

[서울=뉴시스]  민주주의를 이끄는 의회란 정견을 달리하는 시민 집단들이 안전하고 평화롭게 숙의하는 장소를 뜻한다.

프랑스나 미국의 의회를 뜻하는 'Assembly'와 'Congress'는 함께 모이는 곳을 뜻하고 영국의 의회를 가리키는 'Parliament'는 말하는 곳이라는 어원을 갖고 있다.

집권당과 반대당으로 나뉘어 심의와 토론, 조정과 합의를 통해 적법한 결정을 이끄는 의회에서 말과 언어는 중요하다. 민주주의는 강제가 아니라 설득의 힘으로 운영되고 설득은 말의 힘을 통해 작동하는 인간 활동을 가리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에서 말, 즉 언어의 중요성을 사실상 최초로 이론화한 철학자다. 그는 자신의 책 '정치학'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언어 능력을 가진 유일한 동물이다. 지성과 덕성을 위해 쓰도록 언어라는 무기를 갖고 태어났지만, 이런 무기들은 너무나 쉽게 정반대의 목적을 위해서도 쓰일 수 있다. 그래서 덕성을 갖추지 못하면 인간은 가장 불경하고 가장 야만적인 존재가 된다."

'수사학'(Rhetorike)이라는 책을 통해서도 아리스토텔레스는 '공적인 언어'(rhe)를 '말하는 사람'(tor)이 '발휘해야 할 실력과 솜씨'(ike)가 왜 중요한지를 자세히 논한 바 있다.

그의 스승인 플라톤은 수사학적 설득이란 참된 진리를 알게 하는 게 아니라 '원하는 것을 믿게 만드는 일'이자 '쾌락에 봉사하는 일'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이런 스승의 생각을 비판하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설득과 수사학이야말로 정치에서 가장 윤리적인 실천이라고 주장했다.

플라톤의 관점에서 보면 좋은 정치란 최선의 지식을 가진 자가 통치하는 것을 뜻한다.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지식의 왕국은 한마디로 말해 '식자층의 지배체제'(epistocracy)가 아닐 수 없다. 소수의 철학자 내지 전문 지식인 엘리트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인 플라톤에 비해 민주주의에 대해 훨씬 더 긍정적으로 생각했고 다수의 지혜 또한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훌륭한 정치가라면 다수의 시민을 말로 설득하고 실천으로 이끌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공적 언어를 유익하게 사용하는 수사학이야말로 정치학의 핵심이라 여겼고, 이를 철학 못지않게 중시한 전통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작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 언어의 수사학적 요소를 로고스(logos), 파토스(pathos), 에토스(ethos)로 구분했다. 로고스란 말의 내용(contents)에 대한 책임감을 가리킨다. 무책임한 말이 정치적으로 얼마나 유해한가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이 없겠는데, 지금 우리 국회가 이런 비판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파토스는 듣는 이(hearers)에 대한 존중을 가리키며 그 핵심은 상대와 공유할 수 있는 삶의 경험(life experience)을 나누는 데 있다. 국회의원들의 말과 행태가 상대 당 의원이나 정견을 달리하는 시민들과 과연 얼마나 공감될 수 있는지를 돌아보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에토스는 공적 윤리에 대한 헌신성을 가리킨다. 에토스는 윤리·윤리학을 뜻하는 ethics의 정치적 얼굴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런 에토스는 '말하는 사람'(speaker)이 가진 인격(character)을 통해 구현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 언어의 세 요소 가운데 이 에토스를 가장 중시했는데, 그로부터 신뢰(trust)와 권위(authority)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우리 국회를 이끄는 정치인들의 말은 동료 시민들로부터 신뢰와 권위를 인정받을 만한 인격성을 갖추고 있는가? 열에 아홉은 그렇지 못하다고 본다.

그래서 간혹 경청할 만한 연설이나 말을 한 국회의원들이 더욱더 주목받는다. 그렇지 않은 의원들의 말은 그의 인격성을 의심하게 하거나, 감성적 공감은커녕 서로가 인지하고 있는 사실에 대한 판단마저도 엇갈리게 만드는데, 그 때문에 민주주의가 필요로 하는 의회 공론장은 그 빛을 잃어버리고 만다.

의회를 움직이는 것은 의원이다. 의원은 입법자(legislator)로서 평등하고 독립된 결정을 할 수 있는 헌법기관이다. 의원 개인 자체가 독립된 제도라는 뜻이다.

'제도로서의 의원'은 소속정당의 크기나 선수, 경력, 나이와 상관없이 동등성(collegiality)의 원리 혹은 평등한 존경(equality of respect)의 원리로 작동한다. 행정부나 내각에는 'prime minister(수상 내지 총리)'가 있다지만, 의회에서는 'prime legislator(수석 입법자)'가 없다.

의원이 하나의 독립적인 제도라면, 개별 의원은 의안의 발의에서 심의, 결정에 이르기까지 합리적 의사 진행을 방해할 수 있는 말과 행위를 절제할 정도의 '품위와 정중함'(civility)을 갖춰야 한다. civility란 동료 시민에 대한 예의라는 뜻을 가진, 공화정의 정치 전통에서 유래한 용어다.

고대 아테네 민주정의 중심 원리였던 '평등한 발언'(isegoria) 규칙도 중요하다. 타자의 발언권을 침해하는 말의 독점 행위는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범죄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많은 민주주의 국가들의 의회가 발전시켜 온 '의원 규범'의 예에서 볼 수 있듯 그에 적합한 공동의 윤리(decorum)를 발전시키고 또 준수해야 한다. decorum 역시 행위 주체에 적합한 미덕이나 윤리를 뜻하는 스토아학파의 개념에서 유래한 말이다.

의회 일원으로서 가져야 하는 동료의식(philia)도 중요하다. 친애나 우애로 번역되어 온 philia는 이익이나 유용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의 선과 덕을 북돋는 데 필요한 우정의 원칙을 뜻하는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의 중심 개념이다.

소속정당, 이념, 이해관계 등에서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의회정치의 '다원주의의 효과'는 이상과 같은 공동의 기반(common ground) 혹은 공유 규범 위에서 발휘된다는 점을 이해하는 사람이 의원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의회를 싸움판으로 만드는 사람이 입법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국회의원의 말이 사나워지면 민주주의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정치인의 말이 혐오스러워지기 시작하면 사회 또한 적대와 증오로 분열되기 마련이다. 스스로를 돌아보는 '반성적 성찰' 대신 상대를 정형화해서 비난하는 언어가 지배하면 제1의 주권기관인 국회는 공동체를 죽음으로 내몰 수 있다.

이런 평범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우리 국회는 서로가 이해하고 공감하고 동의할 수 없는 말의 흉기들로 넘쳐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앞서 살펴본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은 로마 공화정에서 키케로에 의해 전승되었다. 그가 저술한 책들 역시 수사학의 고전이 되었다. 이 책들을 통해 키케로는 혀의 훈련을 통해 얻게 되는 기교나 뻔뻔함이 아니라 진실한 주제를 단어에 담아내는 정치 언어의 수사적 힘을 강조했다.

그의 죽음마저도 '비극적 장엄함'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당시 공화정을 위협했던 안토니우스를 비판한 연설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나이 64세에 키케로는 연설문을 작성했던 두 손과 함께 목이 잘려 광장에 전시되었다.

한때 카이사르는 키케로 책을 몰래 보던 한 젊은이와 부딪혔을 때 얼른 책을 숨기려는 젊은이를 괜찮다고 제지하며 이렇게 말했다. "참 연설을 잘하는 분이시지. 이보게 젊은이, 그 분은 참 연설을 잘하는 분이시네. 그리고 조국을 사랑하는 분이시라네."

지금 우리 정치인에게 그런 정도의 진지함과 헌신성을 기대할 수는 없다 해도, 최소한 그 풍모를 닮으려는 노력은 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내용 없이 사납기만 한 말 대신 균형적인 판단과 책임 있는 결론, 정제된 표현을 중시하는 의원이 많아져야, 정치도 민주주의도 제 역할을 할 수 있다.

박상훈 국회미래연구원 초빙연구위원([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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