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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언의 책과 사람들]무더운 여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등록 2021.07.17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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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감옥으로부터의 사색(사진=한상언 제공)2021.07.14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대학시절 ‘기초연기’라는 수업을 수강한 적이 있었다. 미국에서 연기술을 배운 교수님이 가르쳤는데, 그 교수님은 유명 연기자들을 배출하고 스타 배우들의 연기지도를 맡기도 해 그 분야에서 꽤 명성을 얻은 분이었다.

연기를 전공하는 학생들에게야 무대에 한번이라도 더 서 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될 테지만, 그렇지 않은 학생들은 무대에 서는 것이 마치 발가벗겨진 채 남들 앞에 서는 것처럼 무섭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수업을 피할 수도 없었다. 전공필수 강좌이다 보니 졸업을 위해서는 모든 학생들이 이 수업을 반드시 들어야 했다.

교수님은 무대에 선 배우는 그 배역과 같은 인물이 되어야 하고, 그것이야 말로 살아 있는 연기라는 것을 늘 강조했다. 하지만 인생을 바꿀 정도로 대단한 메시지가 있거나 해답지를 보는 것과 같은 연기술의 정답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가끔 교수님은 무대에 선 학생들의 내면의 상처를 건드려 눈물을 쏟게 만들었는데, 그럴 때마다 그 자리에 내가 서 있다고 생각하면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평가는 103개의 독백이 실린 책에서 하나를 골라 빈 무대에서 자신만의 연기를 펼치는 것이었다. 학기 초부터 어떤 독백을 들고 무대에 설지 고민이 많았다. 아무래도 한 페이지 분량의 독백만으로는 이 작품이 도대체 어떤 내용과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희곡의 어느 부분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살아있는 연기의 일부라도 보여주려면 작품에 대한 연구는 필수였다.

독백 모음집을 몇 번이나 읽은 후, 나는 희곡이 아닌 맑은 물처럼 깔끔한 한 통의 편지글을 선택했다. 여름 징역살이에 대한 생각을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이 편지는, 여름 징역은 옆에 있는 사람을 단지 37℃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하며 그 열덩어리가 던지는 불면과 불쾌 그리고 이것이 만들어 낸 증오의 감정은 가장 가까운 사람을 향하게 된다며 감옥살이가 만들어 낸 ‘부당한 증오’ 성찰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짜증이 섞인 투정이나 불면에 시달린 불만 가득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조만간 오게 될 가을의 서늘함이 이웃의 따뜻한 체온을 다시 느끼게 만들 것이라는 희망의 목소리였다. 그 글을 읽을 때마다 깔끔한 문장과 따뜻한 내용이 마음에 들었다.

이 글이 실린 ‘감옥으로부터의 사색’(햇빛출판사, 1988)을 도서관에서 찾아 읽었다.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형을 선고받았던 신영복 선생이 쓴 서한을 모은 책이었다. 책을 읽고 나니 신 선생의 단정한 모습과 긍정적인 삶의 태도, 출옥이 예정되어 있지 않은 그의 막막한 감옥 생활이 더욱 실감났다.

나는 마지막 수업일이 되어서야 무대에 섰다. 그때까지 무대에 서지 않은 학생들이 연기를 위해 차례로 무대에 올랐고 나도 그 틈에 끼어 독백을 했다. 평가해야 할 학생들이 많다보니 다행히 눈물을 쏙 빼놓는 질문은 없었다.

후덥지근한 열대야에 뒤척이다가 잠이 깨 에어컨을 켜는 밤이 잦아졌다. 그 때마다 대학 1학년 때 무대에 서서 독백을 하던 기억이 불쑥 찾아온다. 연기수업이 펼쳐졌던 지하 소극장의 무대와 부서지듯 쏟아지던 조명, 가슴 뜨겁게 만들던 신영복 선생의 책이 자연스레 생각난다.

그럴 때면 조만간 노염(老炎)은 더는 버티지 못할 테고 조석의 추량(秋凉)이 찾아올 것을 기대하게 된다. 그게 세상의 이치일 테니 말이다.

▲한상언영화연구소대표·영화학 박사·영화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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