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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언의 책과 사람들]남과 북의 ‘임꺽정’

등록 2021.07.31 06:00:00수정 2021.08.02 09:4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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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북한의 국립출판사에서 발행된 '림꺽정'(사진=한상언 제공)2021.07.28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서울올림픽 개막을 앞둔 1988년 7월19일, 정부는 월북 작가에 대한 공식 해금 조치를 발표했다. 해방 후 북한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로 이름이 지워져야 했던 인물들을 역사의 무대로 불러오는데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1948년 북위 38선으로 나뉜 한반도의 남북에 서로 다른 정부가 들어서고 불과 2년이 채 못돼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서울시 경찰국에서는 월북인사들이 남긴 저작물의 출판과 유통을 금지시켰다. 이로써 월북인사들의 책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될 수 있는 위험한 시대가 40년 가까이 이어졌다. 출판이 금지된 채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던 그들의 이름은 올림픽이라는 평화와 화해의 장을 통해 부활할 수 있었다.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조치였다.

정부의 해금조치가 있기 전 출판계에서는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위험을 무릅쓰고 월북 작가의 중요 작품들의 출판을 감행하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1985년 사계절출판사에서 전9권으로 발행한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이었다.

이 책은 독자들에게 널리 읽히면서 신생 출판사인 사계절의 이름을 알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월북 작가 해금 조치 이후 여러 출판사에서 다양한 버전의 '임꺽정'이 출간됐지만 첫 번째로 발간된 사계절 판은 마치 정본과 같은 위상을 가지게 됐다.

'임꺽정'은 1928년 조선일보 지면에 연재가 시작된 이후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된 이후 자매지 '조광'으로 지면을 옮겨가면서까지 단속적으로 연재된 당대 가장 인기 있던 소설이었다.

해방 전 조선일보사에서는 자사의 지면에 연재되던 이 소설을 단행본으로 발간했으며 해방 후에는 을유문화사에서 재출간되기도 했으나 미완의 소설이었다. '임꺽정'이 어떻게 마무리 될지는 해방 후 독자들의 초미의 관심이었다. 하지만 일제말기와 해방직후라는 민감한 시절은 벽초가 펜을 들 수 있는 여유를 주지 않았다.

홍명희의 '임꺽정'에 대해 처음 이야기를 들었던 것은 해금이 있은 지 오래지 않은 시기였다. 국어선생님으로부터 '임꺽정'이라는, 우리말의 보고와 같은 소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머릿속에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얼마 후 도서관에서 그 책을 발견하고 맛만 보자는 심정으로 책을 집어들었으나 한번 읽기 시작한 책을 손에서 뗄 수가 없었다. 영화의 등장인물처럼 명쾌한 소설 속 인물들의 모습과 문장 사이사이에 박힌 생경하지만 아름다운 단어들이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제1권 봉단편을 시작으로 총 9권으로 구성된 책을 읽는데 불과 며칠 걸리지 않았다. 그만큼 흥미진진했다.

이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로 항상 벽초의 '임꺽정'을 첫손가락에 꼽게 됐다. 그래서인지 책을 수집하면서 '임꺽정'의 여러 버전을 소장하게 됐다. 그 중에는 영화사연구자인 함충범 선생이 자취집을 정리하면서 내게 준 새빛출판사 판 '임꺽정'을 비롯해 북한의 국립출판사에서 발행된 '림꺽정' 등 잘 알려지지 않은 버전도 있다.

희귀본이라 할 수 있는 국립출판사 판 '림꺽정'은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4년부터 1955년 사이 의형제편(1권-3권)과 화적편(4권-6권)을 총 6권의 책으로 정리해 발간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이야 말로 벽초가 생각한 '임꺽정'의 최종 버전이라 할 수 있다.

북한에서 '임꺽정'은 지배계급에 대한 피지배계급의 저항과 투쟁이라는 관점으로 해석돼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1987년부터 1989년까지 3년 동안 총 5부작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1998년 KBS를 통해 남한에서도 방송돼 남북 문화교류의 이정표 같은 작품이 되었다. 남한에서는 1994년 SBS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져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얼마 전 영화제작자인 영화사 하얼빈의 이진숙 대표가 사계절에서 새로 낸 '임꺽정'(전10권)을 내게 선물했다. 이 대표가 영화사 사무실을 과거 사계절출판사가 자리하고 있던 복합문화공간 에무로 옮긴 뒤라 더 뜻깊은 선물을 받은 셈이었다. 이 날 '임꺽정'이 사계절에서 출간되면서 책을 압수당했다가 재판을 통해 돌려받게 되었던 흥미로운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영화로 만들어도 재미있을 이야기였다. 그날 반갑게 받아 온 책은 서가 한쪽에 나란히 꽂아 두었다. '임꺽정'이 자리한 서가를 바라보고 있으니 좋아하는 책은 읽지 않아도 마음이 뿌듯하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책을 모으는지도 모르겠다. 

▲한상언영화연구소대표·영화학 박사·영화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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