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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언의 책과 사람들]세상을 돌고 돌아 살아난 ‘진단학보’

등록 2021.10.23 06:00:00수정 2021.10.23 15: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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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도서관에 책이 넘친다. 공간은 한정돼 있는데 새로운 책은 계속 들어오고 있으니 그럴 것이다. 매년 대출 순위를 정해 이용객들이 대출하지 않은 책들은 폐기 처분한다. 폐기 처분된 책들은 폐기물 업자가 수거해 간다. 어느 대학에서는 폐기 대상 책들을 학생들이 가져 갈 수 있게 얼마간 도서관 앞에 쌓아 두기도 한다.


폐기된 책들 중 일부는 사라지지 않고 다시 세상을 떠돈다. 눈 밝은 수거업자가 돈이 될 만한 책을 골라 헌책방에 넘기기에 그렇다. 도서 경매장을 다니다 보면 여러 도서관의 장서인이 찍힌 책들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폐기 대상이었다가 다시 생명을 연장한 책이다.

중국 대학들도 책이 넘치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내가 중국에서 구입한 많은 책들이 도서관의 폐기 서적들이다. 이 중에는 1950-60년대 국내에서 발간한 책 몇 권도 포함되어 있다. 흥미롭게도 이 책들은 '책 보내기 운동' 차원에서 국내 책을 모아 중국의 대학에 보낸 것들이다. 중국 대학에 한국학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 달라는 의미로 보낸 책들을 만나 반갑기도 하면서, 대학 도서관이 아닌 헌책방 한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고 하니 한편으로는 입맛이 쓰다.

중국에서 구입한 책 중에는 그 유명한 '진단학보'도 있다. 연경대학 장서인이 찍힌 이 책 역시 폐기된 책 중 하나이다. 이 책은 나름의 흥미로운 사연을 지니고 있다. 일제 하 조선인 학자들은 일본인들이 주도하고 있던 한국학을 우리의 힘으로 연구 진흥 발전시키기 위해 1934년 진단학회를 만들고 그 기관지로 '진단학보'를 발간했다. 진단학보가 세상에 나왔을 때 학회에 참여한 조선인 학자들과 지식인은 마치 자식을 낳은 것처럼 크게 반가워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진단학회의 회원들은 진단학보를 통해 그 연구 성과가 국제적으로 소개되기를 바랐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진단학보를 수준 있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초창기 진단학보를 살펴보면 그 인쇄상태라든가 종이의 질이 요즘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세계에 내놓아도 꿀리지 않을 퀄리티의 잡지를 만들고 이것을 외국의 학자들에게 선보이기 위해 세계 유수의 대학에 이 책을 보냈다. 평생을 진단학회와 함께 한 이병도 선생의 회고록을 보면 진단학보를 외국의 대학에 보내면서 그쪽 대학에서 발간하고 있는 학술지와 교환을 부탁했다고 한다. 진단학보가 송부된 대학 중에는 연경대학도 포함되었다.

북경에 있던 연경대학은 미국과 영국의 기독교연합체에서 설립한 사립대학이었다. 미국 하버드 대학과 교류를 했으며 그 흔적이 하버드 옌칭도서관으로 남아 있다. 1949년 신중국 성립 후 기독교연합체에서 세운 연경대학은 해산되었고 그 과정에서 문과는 북경대학에 이과는 청화대학에 흡수되었다. 아무튼 진단학회가 탄생한 1934년 무렵 연경대학은 하버드 대학과 연계한 중국의 가장 유력한 대학이었다.

내가 소장한 진단학보는 연경대학 도서관에 있던 것이 대학 해산 후 북경대학 장서로 바뀌었다가 무슨 곡절인지는 몰라도 폐기되어 헌책방으로 흘러 든 것이다. 이 책의 표지를 보면 '請交換'(교환을 요청한다)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다. 바로 진단학보를 연경대학에 보내면서 그 대학에서 발행하고 있던 '연경학보'와 교환을 요청했다는 이병도 선생의 회고록에 있는 대목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이다.

누가 혹은 어느 기관에서 책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이 어떤 경로로 어떻게 흘러갔는지 책의 이력을 확인할 수 있다면 그 책의 가치는 더욱 높아진다. 어쩌면 연경대학에 소장되었던 '진단학보'의 경우처럼 책이 지닌 이력은 뜻밖의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알려주기도 한다. 이렇듯 책에 숨겨진 이야기를 밝혀내는 것은 오래된 책을 수집하는 사람들만이 만끽할 수 있는 즐거움 중 하나이다.

▲한상언영화연구소대표·영화학 박사·영화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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