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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마지막 호는 '사암'이었다...이유는?

등록 2022.07.04 14: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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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사암 정약용 전기'. (사진=창비 제공) 2022.07.04.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신효령 기자 = '다산'으로 잘 알려져 있는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1762∼1836)의 마지막 호는 '사암(俟菴)'이다. 이 호에는 "후대에 성인이 내 책을 본다 해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라는 자긍심이 담겼다.

'사암 정약용 전기'(창비)는 정해렴 전 창작과비평사가 정약용의 일생을 망라한 책이다. 저자는 사암이 자신의 6대 종조이기에 그의 전기를 쓰는 일이 어려웠다고 한다. 그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전기의 객관성을 의심받는 일이 없도록 더욱 주의를 기울였다.

사암이 1822년에 자신의 삶을 정리한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 집중본(集中本)과 '사암선생연보'에 주로 의거해 사암의 일생을 돌아본다. '여유당전서' 중 특히 시문집의 작품들을 바탕으로 사암의 사상과 공적을 해설한다.

때로는 자식과 형님에게 세상사와 학문을 이야기하고, 때로는 친구와 함께 시를 짓고 명승지를 유람하며, 때로는 제자와 함께 방대한 저서를 저술한 사암의 일생을 연도별로, 날짜별로 입체적으로 재구성한 다큐멘터리라 할 수 있다.

사암의 생은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청년기에는 빛나는 재능을 가지고 정조 임금으로부터 총애를 받으며 경기 암행어사, 곡산도호부사, 형조참의 등의 벼슬을 역임하고 수원 화성을 설계하는 등 업적을 쌓으면서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다.

장년기에는 신유옥사로 낙마하고 장기와 강진에서 18년 동안 긴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 다산동암에 터 잡고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쓰며 많은 저술과 작품을 남겼다. 귀양이 끝나고 여유당으로 돌아와 저술 정리에 힘쓰던 노년기에는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고 동학들과 교류하며 더 나은 삶을 추구했다.

잘 알려져 있고 이 책에서도 특히 많은 분량을 할애하는 시기는 귀양을 살았던 장년기다. 사암은 가는 곳마다 풍속과 정취, 사회제도의 모순을 시문과 기록으로 남겨 오늘날 조선 후기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들을 남겼다. 관계를 유지하거나 새로 만드는 데도 힘써 다채로운 일화들을 남겼다. 저자는 이 과정을 시간의 흐름대로 서술하면서도 여러 시문과 서간문을 인용하며 사암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재현한다.

생애 첫 작품인 해금강 모습을 읊은 오언시 '그리운 금강산'부터 결혼 60주년 기념일을 자축한 시 '결혼 60주년'에 이르기까지 사암의 많은 저작을 한글로 옮겨 담았다. 110여편에 이르는 다양한 저작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사암의 삶과 문학이 유기적으로 어우러지는 느낌이다.


◎공감언론 뉴시스 snow@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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