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현대미술가' 얀 칼럽 "기하학 추상에 미지의 세계 담았죠"[문화人터뷰]
한국 첫 개인전...호리아트스페이스서 개최
10대 때 그라피티 작가→프라하미술아카데미 졸업
추상+조각같은 원형의 환상적인 색채예술 무기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체코 현대미술가 얀 칼럽(Jan Kalab). 호리아트스페이스와 레지나갤러리의 협업으로 한국에서 처음으로 여는 개인전은 6월 10일까지 열린다. 2023.04.28.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이번 전시는 물속에 사는 생명체들의 형태와 색감에 영감을 받았어요."
한국에서 첫 개인전을 연 체코 현대미술가 얀 칼럽(Jan Kaláb·45)은 '산호섬 그 너머' 전시 제목처럼 신비롭고 환상적인 작품을 선보인다.
"물속 어딘가 신비스럽게 숨어있는 보물 같은 생명체를 떠올리며 겉으로만 봐서는 알 수 없는, 예상하지 못한 아름다운 세상을 이 세상에서 바라보며 탐험을 꿈꾸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번 주제를 생각하면서 "신비로운 물속 생명체들이 실제로는 참으로 연약해서 언젠가는 사라질 존재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그렇다고 지구 온난화 같은 문제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얀 칼럽은 "제가 보고 느끼고 상상하는, 마치 발견되지 못하면 사라져버릴 수 있는 아름다운 물속 생명체들에게 집중했다"고 말했다.
전시된 작품은 타원과 둥근 원이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되어 있다. 추상회화 같기도 조각 같기도 한 작품은 마치 깊은 수심에서 만난 산호초처럼 환상적인 빛을 내는 환영을 보는 듯 하다.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체코 현대미술가 얀 칼럽(Jan Kalab)이 작품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2023.04.28. [email protected]
호리아트스페이스(대표 김나리)와 레지나갤러리(대표 홍정연)의 협력으로 열린 이 전시는 얀 칼럽의 한국에서 처음 선보인 개인전이자 지난 3월 대만 전시에 이은 아시아에서 두 번째 개인전이다.
강렬한 색감과 입체적인 작품은 어린시절 활동했던 '그라피티Graffiti a)'의 흔적이 베여있다.
얀 칼럽은 체코의 대표적인 그라피티 2세대 작가다. 1978년에 프라하에서 태어난 그의 유소년기는 사회적 급변기로 흔히 ‘피를 흘리지 않고 시민혁명을 이룩한 것’을 비유하는 벨벳혁명(velvet revolution)의 시기였다. 1989년 체코(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정권이 붕괴되면서 국경이 개방됐다. 외부에서 들어온 그라피티 문화는 감수성이 한창 예민했던 얀의 예술가적 감성을 일깨워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90년대 초 15세 소년들은 늦은 밤 프라하 거리를 배회하다 적당한 장소를 발견하면 스프레이 페인팅으로 그들만의 태그를 달았다. 이들 중 리더는 얀이었고, 여러 번 체포되기도 했다. 얀과 그의 친구들은 상징적 크루인 DSK(Da Style Killas)를 설립해 1994~95년 처음 베를린 여행을 시작으로 유럽을 거쳐 뉴욕에 이르기까지 ‘그들만의 순례 여행’을 떠났다.
"이 시기엔 지금처럼 본명을 사용하진 않았어요. 당시 태그로 사용된 예명은 ‘SLESH, CAK, CAKES, Point’ 등이었죠. 2000년 초반에 뉴욕 순례에서 지하철이나 기차에 칠한 것이 250여 대에 이르렀을 정도였습니다."
거리 예술가에서 현대 미술가로 변신한 건 대학에 들어가면서다. 2002년 체코에서 가장 오래되고 권위 있는, 1800년 설립된 프라하미술아카데미에 입학했다.
어려서부터 익힌 그라피티를 통해 글쓰기 형태와 콘텐츠의 관계를 심층적으로 연구하고 표현의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글자의 모양이나 색상, 선묘, 스케일 등의 분석으로 좀 더 부피가 큰 3D 그라피티 조각까지 개발해 학교 주변 건물의 외부에 시현하기도 했다. 2006년 프라하미술아카데미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후 2008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세계 미술시장을 누비고 있다. 뉴욕, 마이애미, 런던, 파리, 상하이 및 리우데자네이루 등 세계 유명 갤러리에서 전시를 개최했다.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체코 현대미술가 얀 칼럽(Jan Kalab) 한국 첫 개인전이 호리아트스페이스에서 6월10일까지 열린다. 2023.04.28. [email protected]
어렸을 때부터 단련된 게릴라 그라피티의 속도감과 스케일, 새롭고 실험적인 그래픽 표현 연구 등은 현재의 세련되고 복잡한 ‘얀 칼럽 스타일 추상’의 기초가 되었다.
얀 칼럽은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작가로 체코의 화가이자 그래픽 아티스트인 프란티세크 쿠프카(1871~1957, Frantisek Kupka)를 꼽았다.
"쿠프카는 초기 리얼리즘 회화로 시작해 유럽 추상 미술운동과 색채성이 풍부한 입체주의의 한 분야인 오르피즘(Orphisme) 경향의 작품을 선보였어요."
쿠프카에 대한 동경심에 이어 체코 출신 영국 건축가 에바 지르지체나(Eva Jiřičná)에게 프라하 감성의 예술과 건축, 디자인을 종합적으로 배우면서 그만의 ‘순수 기하학 회화’라는 조형언어를 완성했다고 한다.
2011년 단순화된 큐브와 원형을 근간으로 한 지금의 작품 형식들이 출현했다. 첫 그라피티 작품을 시작한 지 26년 만이었다. 하지만 그 안엔 ‘얀 스타일 그라피티의 상징성과 본질’은 그대로 담겨 이어지고 있다.
특히 그에게 원(圓)의 형상은 다원적 개념을 지니고 있다. 원은 겉보기에 가장 단순하고 쉬워 보이지만, 한편으론 ‘해석하기 가장 복잡한 모양’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얀의 작품은 존재감으로의 구(球)와 공허함·뚫림인 구멍(空)의 개념을 동시에 충족시킨다. 온전함과 불완전함, 움직임과 멈춤의 양립된 감성을 한꺼번에 품고 있는 묘한 생명력을 지녔다.
얀 칼럽 한국 첫 개인전 전시 전경. 사진=호리아트스페이스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작품 자체가 얼마나 많은 우주의 본질을 담고 있는가입니다.”
얀은 “제 그림은 물질적인 세계를 가리키지만, 구체적인 무언가를 포착하려는 것은 아니다"면서 "이 세상에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창조하고, 그 본질을 시각적으로 구현해보려 노력한다"고 했다. "간혹 모양이 유동적이어서 생물학적 형태를 떠올리기도 하고, 기하학적 형태들은 거시적인 우주를 떠올리기도 할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무한히 ‘변화하는 형태의 과정’일 뿐이죠."
스프레이로 캔버스를 칠해 만든 작품은 제한과 경계도 없다. 가상의 세계를 구축하듯 공간감과 팽창감을 보이는 작품은 색채예술의 언어이자 교감의 첫 출발점이다. 회화와 조각의 경계로 특정 짓기 힘든 유기적인 형태의 화면들은 보는 시점에 따라 또 다른 생명력을 자아낸다. 무한성, 재해석된 중력, 끊임없이 변모하는 기하학적 실험은 신비롭고 황홀한 색의 향연이 무기다. 전시는 6월10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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