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이스북
  • 트위터
  • 유튜브

[미래생각]상상하는 인간의 탄생

등록 2019.05.03 11:30:00

  • 이메일 보내기
  • 프린터
  • PDF
【세종=뉴시스】박성원 국회미래연구원 연구위원

【세종=뉴시스】박성원 국회미래연구원 연구위원

【세종=뉴시스】 우리는 행동하기 전에 늘 예측한다. 물건을 옮기기 전에, 집을 나서기 전에, 누구를 설득하기 전에, 내일의 계획을 세우기 전에 우리는 예측한다. 내가 그 일을 잘 할 수 있을까, 그 행동을 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까, 누구에게 득이 되고 누구에게 해가 될까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미래를 헤아리면서 산다.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은 인간만의 것일까, 아니면 동물도 상상할 수 있을까. 국어사전은 ‘상상하다’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나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머릿속에 그려봄”으로 정의한다. 예를 들어 현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있다고 가정하고 행동한다면 이것은 상상을 기반으로 한 행동이다.
 
동물도 이런 것쯤은 할 수 있다. 어떤 침팬지는 조그마한 통나무를 자신의 새끼인 양 데리고 논다. 또 다른 침팬지는 어떤 물체를 담요 안에 넣어 숨기는 행동을 하는데 그 물체는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침팬지가 상상으로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침팬지는 그 담요 속에서 가상의 물체를 꺼내 입으로 가져가 먹는 흉내도 낸다. 이쯤 되면 동물에게도 상상력이 있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동물학자들은 제한적이지만 동물도 상상할 수 있으며, 상상하는 대상이 실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동물은 인간처럼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을 상상하진 못한다. 그리고 상상과 실제의 구별도 인간만큼 잘하지 못한다. 동물과 달리 인간은 다양한 상징적 요소를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내거나, 가상의 이야기를 지어내고, 지금까지 들었던 것과는 다른 이야기를 생산할 수도 있다. 또 인간은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하는 능력도 발휘한다. 이렇듯 동물과 구별되는 이런 인간의 능력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생각의 속임수' 저자 권택영은 동굴 벽화를 그렸던 인간이 처음으로 동물의 세계에서 뛰쳐나온 인간이라고 평가한다. 원시 인류가 그림을 그렸다는 점 때문에 인류는 예술적 특성을 타고난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도 있는데, 권택영은 그때가 “인간이 동물이면서 동시에 동물과 결별하는 순간”이었다고 주장한다.

동굴 벽에 그림을 그렸던 인간을 상상해보자. 그는 밖에 나가 다양한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보다 빨리 달리는, 때로는 자신을 공격할 수도 있는 동물을 쫓아가 목숨을 빼앗았을 것이다. 물론 사냥에 실패할 때가 더 많았을 것이다. 그럴 때면 너무 아쉬운 나머지 눈앞에 어른거리는 먹잇감을 잡지 못한 아쉬움 때문에 밤잠을 못 이루며 뒤척였을 것이다.

동굴 벽화는 말하자면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표현한 것이라는 게 권택영의 설명이다. 자신의 아쉬움, 자신의 성공, 자신의 욕망, 이런 것들은 자의식을 기본으로 깔아야 설명이 되는 감정이다. 동굴 벽화를 통해 인류가 처음으로 동물의 세계와 결별했다고 주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간만이 자의식을 갖는다. 인간은 이런 자의식 덕분에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고, 그 회상된 과거를 벽에 그림으로써 욕망의 흔적을 남긴다.

동굴 벽에 동물을 그렸던 인간이 실제 그가 봤던 동물을 그렸다고 볼 수만은 없다. 순간적으로 그의 눈앞을 스쳐 뛰어가는 동물을 보고 그걸 기억해서 그린 그림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벽에 그린 동물 그림은 사실이 아닌 허구이며, 그가 기억의 조각을 모아 그린 동물이다. 권택영은 과거를 회상하고 허구를 꾸며내는 인간이 바로 상상력을 갖춘 인간이라고 말한다.

지나간 일을 기억하고 남들에게 그 일을 풀어내는 일은 사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일이다. 친구나 가족에게 오늘 어떤 일이 있었고, 그래서 어떤 기분이 들었고, 그래서 앞으로는 어떻게 할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것을 넘어 미래의 행동이나 태도를 결정하는 것까지 대화를 나눈다. 뇌과학자들은 회상과 공감, 미래에 대한 예상이 모두 뇌의 같은 부위에서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이렇듯 우리는 늘 무의식적, 의식적으로 미래를 이야기하면서 살고 있다.

미래보다 현재가 더 중요하고, 되지도 않을 꿈을 꾸느니 현재에 더 집중하는 삶을 추구한다는 것이 요즘의 사회적 경향이라지만 이는 미래와 현재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는 달라야 한다. 아니, 다를 수밖에 없다. 나와 세계는 늘 변화하기 때문이다.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은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내가 싸울 때다. 현재의 나는 내게 주어진 ‘조건’을 강조한다. 한계를 고려하라고 말한다. 과욕을 경계하라고 조언한다. 미래의 나는 ‘꿈’을 강조한다. 한계를 돌파하라고 부추긴다. 그것은 과욕이 아니라 넘어야 할 산이라고 꼬드긴다.

양쪽의 긴장 관계에서 잠시 벗어나 생각해보면 둘 다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른다. 현재의 나도 중요하고, 미래의 나도 필요하다. 나는 그 사이의 나다. 그 사이에 있지 않고 한쪽 편을 들 경우, 나는 조건과 맥락을 놓치거나, 재미와 도전의 역동성을 잃어버릴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 각자는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내가 만들어내는 간극에서 늘 다시 태어나고 고민하면서 생존과 성장을 모색한다.

박성원 국회미래연구원 연구위원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