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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최저임금 결정,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선 안된다

등록 2019.05.29 17: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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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최저임금 결정,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선 안된다

【서울=뉴시스】강세훈 기자 = 최저임금 심의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내년도 최저임금 인상률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매년 비슷한 최저임금 결정과정을 보면 이런 의심을 단순히 음모론으로 치부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최저임금 심의가 시작되면 노사가 요구안을 제시한다. 공익위원들이 의견 접근을 시키다가 막판에 노동계와 재계 중 한쪽이 퇴장하고, 결국 공익위원들이 중재안을 제시한 뒤 투표해 최저임금을 결정한다. 

 매년 같은 장면이 이렇게 반복되는 데는 현행 최저임금위원회 구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최저임금위원회는 노·사·공익 각 9명씩 총 27명으로 구성된다. 노사 양측의 의견차가 생기기 때문에 사실상 공익위원들이 최저임금 결정의 키를 쥐고 있다. 

이렇게만 놓고 보면 공익위원들이 엄청난 힘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공익위원 9명은 모두 고용노동부 장관이 제청하고 대통령이 위촉한다. 이 때문에 정부 입김이 공익위원에 강하게 작용할 수 밖에 없다. 전문가라 불리는 공익위원들은 소신이 있어도 정부 방침(?)에 반기를 드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공익위원을 거수기나 들러리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 이유다.         

고(故)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 비망록(2014년 업무일지)에는 '6월30까지 내년도 최저임금액 결정. 인상률 놓고 대립. 7% 인상 線(선)'이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실제 2014년 노사 이견이 좁혀지지 않자 공익위원들이 6월27일 새벽 7.1% 인상안을 최종안으로 제시했고, 사용자위원들이 반발해 퇴장한 가운데 투표를 통해 공익위원안으로 결정됐다.
 
최저임금위원회는 그저 형식에 불과하고, 실제론 현실 권력에 의해 최저임금 인상률이 이미 정해져 있었던 셈이다. 

보수 정권 뿐 아니라 진보 정권도 다를 바가 없다. 지난해 5월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는 최저임금 심의를 앞둔 시점에서 "고용과 임금, 사업주의 수용성을 충분히 고려해 (최저임금 1만원) 목표 연도를 신축적으로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발언했다. 

이후 최저임금이 10% 안팎에서 인상폭이 결정될 것이란 설(說)이 나돌더니 실제로 올해 최저임금 인상률은 10.9%로 결정됐다.

최저임금위원장이었던 류장수 부경대 교수는 지난 5월9일 사퇴 입장을 밝힌 기자회견에서 김 전 부총리에게 강력히 항의했다고 털어놓기로 했다.

최저임금 논란이 벌어질 때마다 "최저임금위원회는 독립기구"라고 항변해 온 정부가 최저임금위원회 독립성을 스스로 훼손했음을 최저임금위원장이 인정한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후보 당시 '최저임금 1만원' 공약을 내걸었던 것도 최저임금 결정에 사실상 개입하겠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문 대통령도 최근 KBS 대담에서 "지난번 대선 과정에 저를 비롯한 여러 후보들의 2020년까지 최저임금 1만원으로 인상하겠다는 공약이 최저임금위원회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최저임금위원회 위원장 선출 과정도 비슷한 모양새다. 위원장은 공익위원 중에서 위원 호선(互選) 방식으로 선출하도록 돼 있다. 그런데 공익위원 위촉과 동시에 특정 인사가 위원장에 내정됐다는 얘기가 파다하다.

위원들이 투표로 위원장을 정하기 때문에 결과를 알 수 없다는 게 정부 공식 입장이지만 소문으로 떠돈 내정설이 틀린 적은 한 번도 없다. 작년엔 류장수 교수 내정설이 나온 뒤 실제로 위원장이 됐고 올해는 박준식 교수 내정설이 나온 상태다. 오는 30일 전원회에서 박 교수가 위원장을 맡게 될 지 지켜볼 일이다. 

최저임금 결정기준도 문제가 있다.  

현행법 상 최저임금을 결정할 때 근로자 생계비, 유사근로자 임금, 노동생산성, 소득분배율 등을 고려하도록 기준을 두고 있다.

하지만 지난해 최저임금 인상률(10.9%) 결정 근거를 보면 소득분배 개선분(4.9%), 유사노동자 임금인상 전망치(3.8%) 외에 법 기준 어디에도 없는 '협상배려분(1.2%)'이 포함됐다.
   
'협상배려분'이라는 것이 법으로 정한 결정기준이 아닌 만큼 정부의 최저임금 정책 의지에 따라 인상폭이 정해졌다고 의심할 여지가 있다. 
 
실제로 김강식 한국항공대 경영학과 교수는 지난 28일 최저임금 정책토론회에서 "최저임금 결정은 법에 있는 기준과는 관계없이 정부의 최저임금 정책에 의해 이뤄졌다"며 "정부의 최저임금 정책 의지가 결정기준을 사실상 무용지물화 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는 "1만원 대선공약, 정부 최저임금 정책이 나오면 최저임금 기준은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며 "올해도 마찬가지로 최저임금 인상률 얘기가 나오는데 2~3%라는 정책의지가 표명되면 결정기준은 물론이고, 공익위원이 제 기능을 하기 어려워진다"고 말했다.

최저임금위원회라는 형식적 틀을 빌리면서 실제로는 정부가 실권을 행사하는 이중 구조는 시장에 오해와 혼선을 불러일으키고 행정력 낭비를 가져올 수 밖에 없다.  

특히 작년의 경우엔 최저임금 큰 폭 인상 부작용에 대한 비판이 최저임금위원회 공익위원들에게 쏟아지는 상황이 연출됐고 공익위원들이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초유의 사태로 이어졌다. 공익위원들에게 상당한 부담을 안기고 정부는 뒤에 숨어 책임을 회피하는 구조가 발단이 됐다는 게 노동계·재계·학계 안팎의 시선이다.  
     
지난달 만난 한 최저임금위원회 공익위원은 "욕은 욕대로 먹고 아무 권한이 없는데 누가 공익위원을 하고 싶겠느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쯤되니 정부가 최저임금을 결정하고 책임도 지게 하는 게 더 낫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실제로 프랑스나 네덜란드, 스페인, 뉴질랜드 등 다수의 국가들은 행정부가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대체로 정부 부처간 협의를 거쳐 최저임금안을 준비한 후 노사단체 의견을 들어 정부가 최종 결정한다.

박귀천 이화여대 법대 교수는 최저임금 토론회에서 "사실상 각종 경체부처가 의견을 내고 관여하는 것으로 다 알고 있다. 공익위원은 그냥 들러리 세우는 것"이라며 "최저임금 결정이 정치적 행위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차라리 행정부가 확실하게 책임을 지도록 형식적 틀을 바꾸는 게 맞다"고 말했다.

김강식 교수도 "최저임금위원회가 제 기능을 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솔직히 최저임금위원회가 필요한 지 모르겠다"며 "정부가 최저임금 정책을 가지고 (결정) 하면 된다. 행정부가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방식이나 공익위원 제도를 폐지하고 공익위원 대신 정부가 들어가는 방식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최저임금위원회 무용론이 나오게 된 원인은 고스란히 정부에 있다. 따라서 현재의 최저임금위원회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은 이런 지적들을 외면하는 것으로 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고용노동부가 내놓은 최저임금 결정구조 개편안도 이런 우려를 불식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정부가 내년도 최저임금을 심의·의결하는 과정에서 최저임금 제도를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방안을 함께 내놓지 않으면 과거에 했던 갈등과 불신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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