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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생각]500년 전 저술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리뷰

등록 2019.11.22 1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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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박상훈 국회미래연구원 초빙연구위원

[서울=뉴시스]박상훈 국회미래연구원 초빙연구위원

[서울=뉴시스] 누구도 옛날이야기를 듣고자 고전을 읽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답답한 지금의 현실을 넘어 좀 더 나은 미래의 지혜를 얻고자 고전을 찾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기대만큼 성과를 얻지 못할 때가 대부분이다.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에 저술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도 그런 고전의 하나다. 이 책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사실 끝까지 읽어내기도 어렵고 또 잘 이해하기도 쉽지가 않다. 그런데도 언제나 "잘 나가는" 책이다.

출판업자들 사이에서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으로 통한다. 국내에도 이미 30종 넘는 번역본이 있다. 새로운 번역본도 해를 거르지 않고 꾸준히 나온다. '군주론'을 응용한 실용서나 처세술 책은 훨씬 더 많다. '군주론'에 등장하는 여러 주인공은 인터넷 게임에서도 볼 수 있다. 영국의 한 맥주병에도 마키아벨리 얼굴이 있다. 마키아벨리야말로 시간의 풍화작용에도 쇠락하지 않는, 하나의 산업(industry)이 되었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다.

왜 마키아벨리인가? 이렇게 바꿔 생각해보자. '군주론'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개념은 무엇일까? 혹자는 비르투(virtù)를 떠올릴지 모르겠다. "객관적 상황이나 제약 조건을 뛰어넘을 수 있는 주체적 의지나 역량"을 가리키는 이 말이 '군주론'을 대표하는 개념임에는 틀림이 없다.

마키아벨리는 신의 은총이나 가변적인 운명의 힘을 존중하라고 권고했던 '근대 이전의 수동적 정치관'을 무너뜨리고자 했는데 그런 마키아벨리의 의지를 잘 나타내는 용어가 비르투이기도 하다. 하지만 질문에 대한 정답은 아니다. 파생어나 합성어 등을 모두 합해 50번 정도 사용된 비르투보다 더 많이 사용된, 더 중요한 개념이 있다.

그렇다면 네체시타(necessità)일까? 네체시타는 "선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정치 상황이 갖는 불가피성"을 뜻한다. 때로 나라의 안위를 위해 무기를 들고 폭력을 행사해야 할 상황이 있고 다른 정파의 음모와 계략에 맞서 잔인함조차 선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정치의 본질을 잘 나타내는 개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도 답은 아니다.

포르투나(fortuna)일까? 포르투나란 "인간의 선택을 좌절시키는 악운으로 나타나거나 반대로 벼락부자처럼 갑작스러운 길운으로도 작용하는 정치 상황의 가변성"을 상징한다. 하지만 포르투나도 답은 아니다.

프루덴차(prudenzia)일까? 프르덴차란 "정치의 다양한 상황을 이해하고 변화의 기회를 알아챌 수 있게 하는 인식의 힘"을 가리킨다. 성경에서는 "뱀 같은 지혜"로 표현했고 스콜라철학을 이끈 토마스 아퀴나스는 "실천에 필요한 이성"이라고 정의했다. 하지만 프루덴차도 아니다.

그럼 무엇일까? 당연한 답으로 들리겠지만 하나는 "군주"(Principe)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stato)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 최고의 주인공이라 할 체사레 보르지아를 "미래 권력"(futura potenzia)이라 칭하며 이 두 주제를 다뤘다. 미래 권력이 있다면 과거 혹은 기존 권력도 있다는 뜻인데 이미 시효가 끝나가고 있는 권력과 새롭게 다가오고 있는 권력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당시 생각은 이랬다.

우선 그는 피렌체 같은 '지방의 작은 도시 공동체'로는 이탈리아인의 생존이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고 보았다. 그의 시대인 16세기 초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등장에서 볼 수 있듯이 이제 인간사는 더 큰 광역의 통치 체제를 향한 경쟁의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5대 지방 권력(피렌체와 밀라노, 로마교황령, 베네치아, 나폴리)으로 나뉜 이탈리아가 아니라, 이들을 통합해 하나의 이탈리아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게 '군주론'의 중심 주장이었다.

당시 이런 국가(sato) 개념은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었다. 국가(영어의 state, 불어의 État, 독일어의 Staat)가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된 것은 16세기를 지나며 서서히 나타난 변화였다. 영토·주권·국민의 3요소로 이루어진 국가 개념은 17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분명해졌다. 그 이전 세기, 즉 마키아벨리 시대까지만 해도 이탈리아어의 stato나 영어의 state는 "지위나 상태"를 가리키는 보통 말이었고 '군주론' 곳곳에도 이런 용법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런 상태에서 마키아벨리는 stato에 "구속력 있는 명령이 적용되는 독립된 범위의 통치체"라는 의미를 담아낸 것이다. 그의 이런 노력이 없었다면 20세기 초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가 정의한 대로 "국가란 특정한 영토 안에서 폭력의 정당한 사용을 독점한 인간 공동체"라는 용어로 발전할 수 없었을지 모른다. 이를 위해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국가(stato)라는 용어를 비르투보다 두 배가 더 많은 110회 정도 사용해야 했다.

그렇다면 왜 체사레 보르지아였을까? 로마 교황(알렉산데르 6세)의 숨겨진 아들이자, 용병 대장, 나아가 전쟁 영웅에 가까웠던 그를 통해 마키아벨리는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군주론'의 중간 부분을 보면 프랑스 루이 12세의 총리대신인 "루앙의 대주교"(조르주 앙부아즈)와의 대화 장면이 나온다.

이때 마키아벨리가 강조한 것은 이렇다. 당면한 유럽의 중심 문제가 겉으로 보기에는 '전쟁'의 형태를 띠고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 더 중요한 것은 '국가 형성'에 있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프랑스 총리대신에게 "당신이 전쟁을 알고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정작 국가는 모르고 있다"고 응수했다. 요컨대 당시 이탈리아와 유럽을 휩쓸고 있던 전쟁의 문제는 국가 간 체제 즉 근대적 국제 질서를 향해 달려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군주론'의 마지막은 르네상스 시기를 대표하는 인문학자 페트라르카를 인용하며 이렇게 끝난다. "광포한 침략에 맞서 비르투는 무기를 부여잡을 것이다. 전투는 길지 않을지니 이는 고대의 용맹이 이탈리아인의 마음속에서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기 때문이다." 지방 권력과 도시로 흩어진 이탈리아가 아니라 하나의 통일된 국가를 창출해내기 위한 이탈리아인들의 분투와 노력을 격려하는 것이 '군주론'의 결말이다.

이 과업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체사레 보르지아라는 군주(Principe)가 어떤 측면에서 성공하고 또 어떤 이유에서 실패했는지를 분석한 것, '군주론'의 본론은 그것이다. 나아가 향후 누군가 국가라는 이 미래 권력을 세우는 과업을 이어가고자 한다면 "모범적인 지침으로 그의 활동"에서 배울 것이 무엇인지를 열정적으로 토로하고 있는 것이 '군주론'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을 통해 보면 왜 오늘날 이탈리아인들이 마키아벨리를 "애국자"로 칭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마키아벨리에 대한 이탈리아인들의 애정과 존경은 대단한데 지금도 그의 존재는-르네상스의 천재 예술가의 한 사람인 미켈란젤로의 무덤이 있는-산타크로체성당 안에 "어떠한 찬사도 그 위대한 이름에 합당치 않다"는 기념 문구가 새겨진 무덤에서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이야기를 마친다면 왜 마키아벨리인가에 대한 설명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무엇보다 그가 국가라는 미래 권력을 창출하기 위해 군주에게 권한 것들에는 통상의 도덕론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 적지 않은데 바로 이 문제를 다루지 않고는 마키아벨리가 가져온 대변화의 실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군주론'의 첫 문장으로 가 보자.

'군주론'은 "군주(Principe)로부터 호의를 획득(acquistare)하려는 자들은~"으로 시작된다. 우선 여기서 말하는 군주는 '왕'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re(king)와 monarca(monarch)보다 훨씬 넓은 개념이다. '통치자'나 '리더', '정치가', '입법자'로 이해해도 얼마든지 무방하다. 그래서 정치사상 분야 연구를 주도하는 영국 캠브리지 학파의 퀜틴 스키너(Quentin Skinner) 교수는 Principe(군주) 대한 영어 번역을-그간 주로 채택해 온 Prince 대신-Ruler로 바꿔 옮겼다.

하나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에 나오는 '획득'이란 표현이다.그간 국내 번역본은 대부분 이 부분을 "호의를 얻고자", "호의를 구하고자" 등으로 옮겼다. 하지만 이는 마키아벨리답지 않다. 왜냐면 그는 호의는 물론 은혜도, 사랑도, 믿음도 모두 자신의 주체적 의지로 획득해 내야 한다고 여겼고 이것이야말로 '군주론'이 동반한 세계관의 변화였기 때문이다.

'군주론' 본문에 나오는 몇 개의 문장을 더 보자. "군주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는 것이 더 나은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사랑받기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야 훨씬 안전하다는 것이 나의 대답이다. 인간이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자신이 좋아서 그런 것이지만 군주를 두려워하는 것은 군주의 뜻에 따른 것이기에, 현명한 군주라면 자신의 행동을 다른 사람의 의지가 아닌 자신의 의지에 기초해 결정해야 한다."

또 다른 표현을 보자. "당신은 다른 누군가가 손잡아 줄 것을 기대하고 넘어져서는 안 된다. 이런 방어책은 당신 자신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기에 비겁한 일이다. 바람직하고 확실하고 영구적일 수 있는 유일한 방어책은 당신 자신과 당신의 비르투에 의존하는 것이지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또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현명한 군주는 동맹군으로 승리하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군대로 패배하는 것을 택한다. 동맹군에 의존해 얻은 승리는 진정한 승리로 평가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남의 호의에 기대거나 의존해 수동적으로 구하고 얻기보다 자신의 의지와 힘, 주체적 역량을 적극적으로 행사해 획득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당시 이탈리아가 처한 상황에서 마키아벨리가 진정으로 권고했던 정치관이었다.

신의 은총과 운명의 힘을 빌리지 못하더라도, "인간의 방법"은 물론 "짐승의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꼭 필요한 변화를 반드시 이루라는 것이다. 무모할 정도로 과감하게 나서라는 요청이 아닌 것은 마키아벨리적이지 않다. 누구보다도 자신의 선의를 앞세워 변명하고 주어진 상황을 탓하거나 알리바이 삼는 것만큼 마키아벨리가 경멸했던 태도는 없었다. 그리고 이 때문에 마키아벨리는 늘 "악을 가리키는 정치 교사"로 비난받기도 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태연하게 이렇게 말한다. "만일 인간이 모두 선하다면 (자신이 권고하고 있는) 이런 계율은 유효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인간은 천사가 아니다. 천사를 데려와 정치를 맡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인간이란 아버지의 죽음은 쉽게 잊어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을 유산을 빼앗기는 일은 좀처럼 잊지 못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덧붙였다. "인간이란 은혜를 모르고, 변덕스럽고, 위선적이고, 가식적이며, 위험은 감수하려 하지 않으면서 이익에는 밝다. 그러므로 전적으로 이들의 말만 믿고 다른 대비책을 마련하지 않는 군주는 파멸한다."

아마 이 정도에서 질겁하는 사람이라면 '군주론'의 더 잔혹한 표현을 감내하지 못할 것이다. '군주론'에 나오는 이런 주문은 어떨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인간들이란 다정하게 대해 주든가 아니면 아주 짓밟아 뭉개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란 사소한 피해에 대해서는 보복하려 들지만 엄청난 피해에 대해서는 감히 복수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려면 그들의 복수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아예 크게 주어야 한다."

물론 이런 주장에 대해서까지 마키아벨리를 굳이 옹호하려 들 이유는 없다. 그가 정당화한 정치의 실천 방법 가운데는 분명 음모가나 파시스트 전체주의자들이 악용할 수 있는 것들로 수두룩하다. 실제로 이탈리아 파시스트 지도자 무솔리니는 마키아벨리에 대한 박사 학위 논문을 썼고 또 그를 신봉했다.

마키아벨리의 모든 것이 아니라 선별해서 수용하고 평가하는 지혜 또한 필요한 게 사실이다. 다만 마키아벨리의 지극히 현실주의적 인간관과 그에 따른 실천적 권고나 조언이 당시로서는 달리 벗어날 수 없는 전통적인 정치관을 혁파하는 데는 큰 성공을 거두긴 했다. 그래서 이런 마키아벨리가 없었더라면 17세기 영국의 자유주의 정치철학을 연 토머스 홉스도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토머스 홉스는 마키아벨리를 이어받아 인간의 삶이란 "외롭고 궁핍하고 더럽고 냄새나고 심지어 짧기까지 하다"라고 말했다. 그런 인간이 자신의 자유와 생명의 안전을 추구하고자 한다면 모두가 절대적으로 복종할 공권력을 창출해야 한다며 "리바이어던"이라는 제목의 책을 통해 근대 국가의 모습을 그려냈다.

주권의 절대성과 그에 대한 시민의 복종을 요청하는 자신을 비판하고 나선 도덕론자들을 향해서는 그들도 "밤에 문단속을 한다. 이웃을 신뢰한다면 이런 행동을 할까. 내가 말로 인간을 비난했다면 그들은 행동으로 인간을 비난하는 사람들이다."라고 응수했다.

국가는 정당한 권력이기는 하나 본질은 폭력이 아닐 수 없다. 평화와 안전의 획득을 위해 실존하는 폭력과 강제를 공권력으로 통합해내고자 한 것, 마키아벨리로부터 시작된 지적 기획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마키아벨리에게 "폭력이냐 비폭력이냐"는 선택이 아니다. 그보다는 폭력의 선용 혹은 불가피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이 그의 주요 관심사였다.

따라서 "견제되지 않는 권력이냐 견제 가능한 권력이냐", "자의적인 권력이냐 책임을 부과할 수 있는 권력이냐"와 같은 현실주의적 질문은 전적으로 마키아벨리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인간은 국가 없는 공동체나 무정부 상태보다는 사회 구성원이 적법하고 적당하다고 인정하는 동의할 만한 정부를 만들어야 자유와 생명 그리고 노동의 결과로서 재산을 더 잘 지킬 수 있다고 믿고 좋은 국가, 좋은 정부, 좋은 정치를 찾아 나서는 긴 여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제 긴 이야기를 마쳐야 할 때인데 마키아벨리는 스스로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삶의 기쁨을 향유하기 전에 가난을 참아내는 방법부터 배워야 했다." 귀족이 아니라 가난한 서민 출신이라는 뜻이다. 29살에 늦은 공직을 시작했고, 그전까지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누구에게 배웠는지, 대학은 다녔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통치자보다 뛰어난 참모", "당대 최고의 문장가", "교황과 황제, 재상, 천재 예술가들도 그를 무시할 수 없었던 사람", "민중으로부터 사랑받았고 귀족으로부터는 늘 의심받았던 사람", "고문과 투옥으로 공직에서 쫓겨나 남은 삶을 강제된 저술가로 살아야 했던 사람"이 그를 나타내는 전부다.

그런 그가 나이가 들어 자신의 친구에게 남긴 편지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오늘이나 내일 당장은 아닐지라도 우리 평생에 만나게 될 우리(이탈리아)의 몰락과 노예 상태를 생각하며 당신과 함께 눈물을 흘릴 준비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이탈리아는 프랑스와 에스파냐 그리고 독일(신성로마제국)에 의해 번갈아 약탈을 당했고 1830년대가 되어서야 이탈리아 통일운동은 시작되었다. 마키아벨리가 사망한 1527년 이후 300년이 지나서야 '군주론'의 요청이 현실로 추구된 것이다. 시대를 앞서간 사람의 운명이란 게 이렇듯 얄궂고 슬프다.

박상훈 국회미래연구원 초빙연구위원([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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