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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예술 너머 삶 견디기…송승환 '더 드레서'

등록 2020.11.27 18:4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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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만의 연극 복귀작…안재욱·오만석과 번갈아 호흡

내년 1월3일까지 정동극장

[서울=뉴시스] 연극 '더 드레서'. 2020.11.27. (사진 = 정동극장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연극 '더 드레서'. 2020.11.27. (사진 = 정동극장 제공)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이재훈 기자 = 화려한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반벌거숭이로 미친 듯 방황하며 진실과 대면하는 리어왕. 광기와 허무와 분노 등의 거친 감정을 뒤섞어야 하는 만큼, 웬만한 공력으로는 소화하기 힘들다.

연극 '더 드레서'의 노(老) 배우는 그런데 '리어왕' 공연을 앞둔 분장실에서 첫 대사조차 생각나지 않는다. 끊임없이 되뇌지만 '햄릿' '오셀로' 등 다른 셰익스피어 대사가 더 뒤섞인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2년 영국. 히틀러가 셰익스피어를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시절, 노배우가 이끄는 셰익스피어 전문 극단은 운영도 어렵다. 젊은 배우는 전쟁에 참여하고 있고, 그나마 남은 배우는 사정이 생겨 늙은 스태프가 배역을 대신한다.

노배우의 드레서 '노먼'이 객석 안내 멘트 도중 "공연이 시작되니 살고 싶으신 분은, 아니 나가고 싶으신 분들은 나가셔도 괜찮다"고 말할 정도니 보통 엄혹한 상황이 아니다.

시대와 배경이 달라도 지금이 겹쳐진다. 코로나19라는 세계적 재난 속에서 공연을 올린다는 것은 매일 매일이 전쟁이니까.

산전수전을 다 겪고도 코로나19, 여기에 시력 악화라는 공중전까지 치르고 있는 배우 송승환이 노배우 역에 캐스팅됐을 때 모두 수긍했다. 배역 이름 없이 선생님(SIR)으로 불리는 해당 역에 그만큼 어울리는 배우도 없다.

노배우는 본 공연이 시작되자 '리어왕' 대사를 줄줄 외고, 급격하게 나빠진 시력 때문에 대본을 읽고 외우는 대신 듣고 외운 송승환은 무대를 종횡무진한다. 

[서울=뉴시스] 연극 '더 드레서'. 2020.11.27. (사진 = 정동극장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연극 '더 드레서'. 2020.11.27. (사진 = 정동극장 제공) [email protected]

브로드웨이까지 진출한 한국 대표 넌버벌 퍼포먼스 '난타' 제작사인 피엠씨(PMC) 프러덕션 대표, 세계의 주목을 받은 '2018 평창동계올림픽' 개·폐회식 총감독, TV 드라마 배우로 대중에 잘 알려져 있지만 송승환은 대학로 연극판을 주름잡은 연극배우다.

연극 '에쿠우스'의 앨런 역을 맡아 청춘의 상징으로 통했다. 그가 2009년 '에쿠우스'에서 앨런을 치료하는 정신과 의사 다이사트 역을 맡는 것만으로도 대학로가 들썩이기도 했다. 송승환 역시 그해를 잊을 수 없는 순간으로 꼽는다.

9년 만의 연극 복귀작인 '더 드레서'를 통해 저력을 과시한다. 자신의 드레서 노먼에게 우악스럽다가도 굴다가도, 자신이 잠들기 전까지 분장실에서 나가지 말아달라고 외로움을 호소하는 장면에서는 한없이 연민과 동정이 생겼다. 

강하게 나오는 극단 소속 배우에게 쩔쩔 매고, 젊은 연인에게는 또 한없이 약한 모습을 보이니 처연하기까지 하다. 한 때 미국 영화계로 진출할 뻔했지만, 무대를 고집하는 '장인 정신'을 뽐낼 때는 의기양양했다.

'더 드레서'는 '그럼에도 예술은 계속돼야 한다'는 당연한 이야기를 당연하게 하는 작품이 아니다. 물론 전쟁 속에서 예술이 견디고 살아남는 방식에 대해 고민하지만, 그 속에 인물들의 고유한 삶과 죽음 방식을 톺아본다.

100분 남짓의 러닝타임(인터미션 제외) 동안 삶의 희로애락 표정을 보여주다, 가을비처럼 떨어지는 송승환의 노배우는 생의 희극과 비극을 동시에 갖고 있다.

[서울=뉴시스] 연극 '더 드레서'. 2020.11.27. (사진 = 정동극장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연극 '더 드레서'. 2020.11.27. (사진 = 정동극장 제공) [email protected]

'더 드레서'가 더 고민할 지점을 안기는 건, 힘겹게 예술적 생을 육십년여 동안 견뎌왔다고 무조건 존중 또는 동정해야 하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막판에 노먼의 보상심리와 얽히는 반전은 이 연극이 단순한 교훈극이거나 마냥 따듯한 작품이 아니며, 삶의 치욕이나 모욕적인 순간을 어떻게 견디느냐에 대해 깊게 고민한 산물임을 증명한다. 예술의 본질 너머 인간의 근원적 욕망을 건드린다. 능청스런 연기 속에 페이소스를 담는 안재욱과 오만석이 노먼 역에 잘 어울리는 이유다.

예술과 삶에서 정말 어려운 일은 힘겨움을 버텨내는 것이 아니라, 그 힘겨움을 견뎌내는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일 지 모른다. 버티고 버텨서 겨우 참아내는 것이 아닌, 자신을 비천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더 드레서'는 이야기한다.

장유정 연출이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명 작가 로날드 하우드의 원작을 각색까지 했다. 한동안 '부라더' '정직한 후보' 등 영화 작업을 해온 장 연출은 삶 또는 인간의 끝자락을 과장하지 않고 유연하게 넘나드는 솜씨를 뽐낸다. '리어왕' 무대와 분장실을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무대 구성, 따듯하면서도 쓸쓸함이 배어 있는 재즈 풍의 음악 등도 잘 어우러졌다.

한편 '더 드레서'는 올해 25주년을 맞은 정동극장(대표 김희철)이 '은세계'(2008) 이후 12년 만에 선보이는 연극이다. 정동극장은 '더 드레서'를 시작으로 꾸준히 연극을 선보인다는 계획이다. 정재은, 배해선이 '더 드레서'에서 선생님의 연인 역에 더블 캐스팅됐다. 내년 1월3일까지.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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