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이스북
  • 트위터
  • 유튜브

[조연희의 타로 에세이-3]엄마의 귀에는 고물 라디오가 산다

등록 2021.03.27 09:00:00

  • 이메일 보내기
  • 프린터
  • PDF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치매에 걸린 엄마는 귀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섬망 증상일 것이다.

기계 소음이 웅웅거릴 때도 있고, 노랫가락이, 때로는 오래전에 죽은 친구의 목소리가 들려오기도 한단다. 엄마 귀에 라디오 한 대가 입주해 온 것이다. 문제는 그 라디오가 몹시 고물이라는 것. 시제도 엉망일뿐더러 채널도 하나뿐이다. 세월의 주파수가 마구 엉겨 잡음을 내고 있다. 이를테면 ‘이순남 여사는 착해’에 이어 ‘해는 져서 어두운데~’ 라는 노래를 부르는가 하면, ‘두만강 푸른 물에~’ ‘순남이가 좋아하는 딸이 왔다’로 초현실적인 문장을 구사한다.

가만히 들어보면 고물 라디오에서 재생되는 소리는 대부분 엄마가 소환해 낸 기억이었다. 그나마 행복했던 기억이 많으면 얼마나 좋을까. 유난히 불우했던 엄마는 불행했던 기억과 사투를 벌인다. 엄마 돈을 떼먹고 간 계주, 아버지의 숨겨 둔 여자, 배신한 친구까지 몰려와 엄마를 괴롭힌다. 엄마가 살기 위해 억압했던 기억들이 역주행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곧 나의 기억

그토록 아끼는 막내딸이 옆에 있는데도 엄마는 무의식의 검은 창고에서 귀신같은 기억들과만 대화를 나눈다. 옆에서 손을 잡고 있는 내가 오히려 엄마에겐 유령인지도 모른다. 엄마의 기억과 나의 기억이 어긋나며 우리는 같은 시공간에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다.

의학이 덜 발달했을 때는 이런 무의식에 지배당한 엄마의 증상을 귀신들렸다고 했을 것이다. 다행히 난 엄마의 섬망 증상이 뇌세포에 베타 아밀로이드란 단백질이 쌓여 일어난 신경성 장애라는 것을 알지만 엄마에게도 나에게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젊음이 기억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면 늙는다는 것은 기억을 지우는 과정일까. 그래서 엄마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고향으로 회귀하는 연어처럼 자꾸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는지도 모른다. 기억의 종착지가 죽음이겠지.

엄마도 아주 가끔은 즐거운 기억이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피식 웃기도 하셨다. 그러나 대부분은 안 좋은 기억들이었다.

새벽녘이면 증세는 극에 달했다. 얼굴은 상기된 채 손까지 벌벌 떨면서 환청과 싸우는 엄마를 진정시키기 위해 무조건 차를 몰았다. 어둠이 벗겨질 때쯤 도착하는 곳은 마장호수였다. 새벽빛을 받아 잔잔하게 물이랑이 출렁이는 모습이 마치 무의식의 파고가 잦아든 엄마의 모습 같기도 했다. 밤새 볼이 한 치나 푹 꺼지고 이마의 주름이 더 선명해진 엄마는 그제야 무거워진 눈꺼풀을 잠시 감기도 했다. 그런 엄마를 옆에서 지켜볼 때마다 문득문득 외로워졌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이 간절해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무의식의 마지막 정거장

언젠가 SNS에서 치매에 걸린 발레리나를 본 적이 있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그녀의 팔다리는 겨울나무처럼 앙상하게 말라 있었다. 눈빛도 흐렸다. 그런 그녀에게 ‘백조의 호수’를 틀어주자 눈빛이 점점 살아나기 시작하더니 팔다리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어나서 걸을 수는 없었지만 어느새 그녀의 팔은 젊은 날 무대에서 선보였던 동작을 재현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왈칵 눈물이 났다.

환청이나 환상이란 의식으로 떠오른 무의식일까.
의식과 무의식의 충돌. 그것이 치매일까.

기억이 지워진 엄마는 내가 아는 엄마가 아니었다. 무의식과 싸우는 동안은 그저 낯선 얼굴의 노망든 할머니였다.

그렇다면 기억이란 무엇일까? 팔다리에, 표정과 주름에 기억이 꽉 차 있을 때 비로소 나란 말일까. 기억이 배어나올 때 비로소 내가 나인 것일까. 나란 곧 나의 기억이란 말인가.

기억이 없어진 자리엔 무엇이 남을까. 언젠가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가짜 버스 정류장을 운영한다는 글을 읽었다. 치매 노인들이 없어지는 이유가 대부분 집에 돌아가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는 특성을 발견하고 노선이 없는 가짜 버스 정류장을 만들어 노인 실종과 배회 증상을 감소시켰다고 한다.

벌레가 숭숭 파먹어 텅 빈 마늘 같은 노인이지만, 그 안에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비록 기억을 잃어가고 있지만 엄마는 지금도 음식을 먹을 때면 꼭 자식들에게 먼저 권한다. 엄마에게 마지막까지 남을 무의식은 바로 우리였던 것이다.

지혜는 무의식에서 나온다

2번 타로의 제목은 ‘고위 여사제’이다. ‘지혜의 여신’이라고도 불린다. 라이더 웨이트 타로를 디자인한 황금 새벽회에서는 흑백의 두 기둥이 상징하는 것처럼 신은 선과 악이 분명하며 이를 ‘토라(TORA)’ 속에 규명해 놓았다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난 토라를 든 채 수문장처럼 꼿꼿하게 앉아 있는 여사제의 모습이 내면적 갈등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장막 뒤로 살짝 보이는 저수지가 거대한 무의식의 저수지처럼 느껴졌고 여인이 그 무의식을 의식으로 억제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녀에게도 엄마처럼 언젠가 무의식의 봇물이 터질까? 그 안에서 살던 식인 상어 한 마리, 의식 밖으로 나오는 건 아닐까.

토라라는 율법을 지키기 위해 여성성마저 감춘 채 근엄함으로 무장한 모습이 결코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흘러나온 물줄기가 잔잔히 발밑을 적시고 있다.

어쩌면 진정한 지혜야말로 토라가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지도 모르기에 말이다.

▲조연희 '야매 미장원에서' 시인 [email protected]

※이 글은 점술학에서 사용하는 타로 해석법과 같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