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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연배의 이야기와 함께하는 와인] 하루키의 책에는 와인이 있다

등록 2021.09.04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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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무라카미 하루키. 2018.08.01. (사진=뉴시스 DB)

【서울=뉴시스】무라카미 하루키. 2018.08.01. (사진=뉴시스 DB)

[서울=뉴시스]  지중해는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의 3개 대륙으로 둘러 쌓여 있다. 온대 기후를 바탕으로 우기인 겨울에도 온난한 날씨가 계속되고 여름에는 다소 덥지만 청명한 날씨가 이어진다. 이러한 기후적 특성으로 인해 지중해 유역은 포도가 잘 자란다.

그리스와 터키 사이에 있는 에게해에는 에메랄드빛 맑은 바다에 6000개가 넘는 그리스의 섬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다. 그 중에서도 미코노스 섬과 산토리니 섬은 여러 예술 작품의 무대가 될 정도로 아름답다. 섬에 있는 오래된 집들은 대부분 하얀색인데 파란색 하늘 및 바다와 어울려 다소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특히 미코노스 섬은 2008년 개봉된 뮤지컬 영화 맘마미아와 1992년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받은 ‘지중해’의 촬영지로 유명하다. 영화 ‘지중해’에서는 이 섬의 풍광에 반해 2차대전 중 낙오된 군인들이 돌아갈 생각을 않는다. 하루키에게도 미코노스 섬은 의미가 깊은 곳이다. 

하루키는 그의 작품활동에서 중요한 시기인 1980년대 후반 어느 날 긴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이후 3년여동안 이탈리아 로마를 비롯한 유럽에 머물며 글을 쓴다. 그리스로 와서는 산토리니 섬과 역시 에게해에 있는 스페체스 섬, 크레타 섬에서 머물기도 했다. 미코노스 섬에 온 하루키는 “소설을 쓰고 싶어 몸이 근질거려” 한달 반을 머물며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유럽 체류 3년 동안 이 작품을 비롯해서 ‘댄스 댄스 댄스’, 여행 에세이 ‘먼 북소리’ 와 같은 작품을 완성한다.

미코노스 섬에서 하루키의 주요한 일과는 글쓰기와 달리기였다. 매일 달리는 것을 본 마을의 한 노인으로부터 더운데 쓸데없이 왜 뛰느냐는 훈계를 듣기도 하였다. 그는 때때로 글을 쓰다가 베란다에 나와 바다위로 펼쳐지는 저녁 노을을 바라보며 와인 한두잔을 마셨다. 저녁에는 굴과 같은 그리스식 해산물 요리와 함께 와인을 마셨다.

스페체스 섬을 방문해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했을 때의 일화는 와인 애호가로서의 하루키를 보여준다. 생선 요리와 화이트 와인을 주문했는데 선거 때문에 주류를 팔지 않자 와인이 없는 식사를 “일본의 장어구이 집에서 간장이 떨어진 것”과 같았다고 표현했다.

크레타 섬에서는 마을에서 와인과 치즈를 얻은 마을 버스 운전수가 구불구불한 산길을 달리면서 승객들과 함께 벌였던 와인 파티에 마음을 졸이면서 동참하기도 했다. 그 때 마신 와인과 치즈가 너무 맛있어서 다시 그 버스를 타고 싶다고 고민할 정도였다.

장기적인 보관과 유통을 위해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와인에 송진을 넣어 생산한 ‘레치나 와인’도 즐겨 마셨다. ‘스푸트니크의 연인’에도 이 와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로마에 머물 때는 토스카나로 직접 가서 ‘키안티 와인’을 구입해 마셨다. 스스로 “토스카나는 와인도 요리도 불평의 여지가 없이 맛있다”고 평하였다.         

하루키의 작품속에는 와인을 마시거나 와인잔을 들고 있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또 등장인물들은 와인을 좋아한다. ‘스푸트니크의 연인’에서는 와인사업을 하는 한국계 여성이 등장하고, ‘1Q84’에서는 17세 여고생이 레스토랑에서 당당히 와인을 주문하기도 한다. ‘노르웨이의 숲’에서는 장례식을 치르면서 와인을 따른다. ‘기사단장 죽이기’에선 보르도 와인, ‘여자 없는 남자들’ 에선 피노누아 고르기가 자신 있다는 등장인물도 있다. ‘1Q84’에선 세리와인에 대한 묘사도 있다. ‘스푸트니크의 연인’에선 ‘1986년산 메독’ 같은 고급와인을 주문할 때는 소믈리에를 위해 약간은 남겨두는 것이 좋다는 대사가 나오기도 한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양을 쫓는 모험’ 에선 여주인공이 아주 차게 칠링된 화이트 와인을 좋아한다. 하루키 자신도 화이트 와인을 즐겨 마시는데 보르고뉴의 샤르도네인 샤블리를 좋아한다. ‘1Q84’의 주인공 아오마메도 샤블리를 좋아한다.

와인의 라벨을 알 수 있는 주요 장면들도 몇 개 찾아본다. ‘여자 없는 남자들’ 에선 주인공이 친구의 여자친구와 키안티 와인을 마신다. 키안티는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키안티 지역에서 생산되는 와인을 말한다. 라벨에 고유한 수탉 로고가 있는 것은 키안티 클래시코이다. 하루키는 키안티 와인 중에서도 ‘바디아 아 콜티부오노’를 좋아했다. 단편 ‘우리들 시대의 포크로어’에선 등장인물이 마시는 콜티부오노의 이름이 그대로 나온다. 이러한 인연으로 나중에 콜티부오노 와이너리로부터 1983년산과 1949년산 콜티부오노 와인을 선물 받기도 했다. 1949년은 하루키가 태어난 연도이다.

‘렉싱턴의 유령’에는 ‘몬테풀치아노’ 와인이 등장한다. 역시 토스카나에 있는 몬테풀치아노 지역에서 생산되는 와인을 말한다. 포도 품종인 몬테풀치아노로 만든 와인을 뜻하기도 한다. 몬테풀치노의 명품와인을 뜻하는 ‘비노 노빌레 디 몬테풀치아노’가 유명하다. 몬테풀치아노 지역은 경치도 아름다워 영화 ‘잉글리시 페이션트’ 등 영화에도 자주 등장하는 곳이다.   

‘1Q84’에서는 “야생 멧돼지가 그려져 있는 샤르도네”가 나온다. 라벨명은 언급이 없지만 이러한 묘사로 보아 소설속의 와인은 소노마 와인인 ‘마르카신(Marcassin)이다. ‘댄스 댄스 댄스’에서는 하와이에서 캘리포니아산 와인을 마시는 주인공 모습이 나온다. 하루키는 하와이, 보스턴, 뉴욕, 포틀랜드 등지의 미국에서도 장기간 거주해 캘리포니아산 와인을 접할 기회도 많았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은 보스턴에서 체류중 썼다.

와인 자체에도 스토리가 있지만 와인을 마시는 사람에게 스토리가 없을 리 없다. 하루키의 소설에 와인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 하지만 무언가는 조용히 뒤에 남는다. 와인 병 밑 바닥의 침전물처럼.” - 하루키.

▲와인 칼럼니스트·경영학 박사·우아한 형제들 인사총괄 임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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