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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동진, 3·1운동 직전 조선군사령관에 귀띔 왜?…박걸순 교수

등록 2021.11.30 09: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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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동진, 조선군사령관 우쓰노미야와 거사 이틀 전 만나

박 교수 "20여년 인연 인간적 관계서 삼자적 화법 귀띔"

[괴산=뉴시스] 강신욱 기자 =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충북 괴산 출신 독립운동가 우당 권동진이 1919년 3·1운동 이틀 전 우쓰노미야 조선군사령관을 만난 것은 인간적 관계에서 들여다 봐야 한다는 박걸순 충북대 교수의 주장이 나왔다. 사진 왼쪽은 청주 삼일공원에 세워진 권동진 선생 동상. 2021.11.30. ksw64@newsis.com

[괴산=뉴시스] 강신욱 기자 =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충북 괴산 출신 독립운동가 우당 권동진이 1919년 3·1운동 이틀 전 우쓰노미야 조선군사령관을 만난 것은 인간적 관계에서 들여다 봐야 한다는 박걸순 충북대 교수의 주장이 나왔다. 사진 왼쪽은 청주 삼일공원에 세워진 권동진 선생 동상. 2021.11.30. [email protected]

[괴산=뉴시스] 강신욱 기자 = 1919년 3·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가 거사 직전 조선군사령관을 만났다면.

충북 괴산 출신 독립운동가인 우당(憂堂) 권동진(權東鎭·1861~1947)이 조선군사령관이었던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郞)를 만난 것은 3·1운동 발발 이틀 전인 2월27일이다.

박걸순 충북대 사학과 교수는 12월3일 괴산문화원 대회의실에서 '충북의 독립운동가 우당 권동진 선생의 생애와 독립사상'을 주제로 열리는 충북학연구소의 2021년 2차 충북학포럼 우당 권동진 선생 탄생 16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이 두 사람의 만남에 주목했다.
 
박 교수는 이날 '권동진의 3·1운동 초기단계 주도와 독립사상의 피력'을 주제로 발표한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권동진이 3·1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군 최고 지휘관을 만나 거사를 우회적으로 귀띔한 언행을 어떻게 볼 것인지, 박 교수의 논문은 여기에 포커스가 맞춰졌다.

3·1운동 이틀 전 두 사람의 만남은 우쓰노미야가 남긴 일기에 적혀 있다.

권동진은 우쓰노미야를 찾아간 자리에서 조선인의 민심이 괴리되는 실상을 전하고 고종황제 국장(國葬) 때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당부를 했다.

외국인 연구자 율리안 비온티노는 논문에서 권동진이 3·1운동 계획을 우쓰노미야가 알고 있는지를 떠보고 그를 속이기 위한 것으로 단정했다.

하지만 박 교수는 "이 주장은 권동진과 우쓰노미야의 오랜 인연과 인간적 관계를 이해하지 못한 피상적 해석"이라며 "권동진은 우쓰노미야와 20여 년 전에 인연을 맺었고 개인적으로 신세를 진 처지였다. 인간적 정리에서 자신이 주도적으로 계획해 이틀 뒤면 발발할 3·1운동에 대해 전혀 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는 더욱더 없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소문을 전하는 형태로 사실을 타자화(他者化)하는 삼자적 화법으로 3·1운동을 귀띔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라며 "발발 시점을 국장으로 특정해 우쓰노미야에게 조심하도록 당부하되 오히려 시선을 국장으로 흩트리는 효과를 거둔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았다.

박 교수는 우쓰노미야가 고종의 국장 때 조심하라는 권동진의 경고에 경비 책임자로서 크게 경계했지만 아무 일 없이 국장을 마치고 자신의 관저로 돌아와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안도했다.

이 부분의 일기와 관련해 박 교수는 "우쓰노미야는 3·1운동이 얼마나 커다란 한민족의 독립운동이었고 어떻게 확산할 것인가를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며 "권동진의 귀띔은 3·1운동 이후 변명의 명분을 쌓기 위해 우쓰노미야를 방문한 것으로 이해함이 타당할 듯하다"고 설명했다.

고종의 국장은 3·1운동이 발발하고 민족대표들이 붙잡힌 이틀 뒤 3월3일 치러졌다.

박 교수는 권동진이 붙잡혀 일제의 혹독한 심문에도 우쓰노미야와의 만남을 밝히지 않은 것 역시 최고 치안 책임자를 곤경에 빠뜨리지 않게 하려는 인간적 정리에서 접근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봤다.

권동진과 우쓰노미야의 관계는 권동진이 '을미년 역신(逆臣)'으로 몰려 1896년 일본으로 망명하고 1906년 귀국할 때까지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자주 만났다. 이 둘은 1861년생 동갑나기였다.

우쓰노미야는 일기에서 권동진을 '구우(舊友)'라고 표현할 만큼 오랜 인연과 친분을 쌓은 사이였다. 그의 일기에 권동진의 이름이 13차례나 나오는 이유다.

권동진은 자신과 함께 을미사변에 연루된 형 권형진이 위기에 처하자 당시 육군참모본부 소속 소령이었던 우쓰노미야를 찾아가 형의 구명을 호소했지만 끝내 형의 사형 집행을 막지 못했다. 둘 사이의 각별한 관계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박 교수는 "권동진과 우쓰노미야의 관계나 2월27일 만남과 언행을 권동진 행적의 흠결로 비판해선 안 된다"며 "3·1운동으로 붙잡힌 권동진은 의연하게 법정공방을 펼치며 독립사상을 피력했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부정하고 10년간의 통치를 신랄하게 비판했다"고 밝혔다.

권동진은 손병희의 영향으로 천도교 간부로서 3·1운동을 주도하고 좌우 합작의 신간회운동 때 회장으로 추대되는 등 독립운동계에 큰 획을 그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이번 충북학포럼에서는 이 밖에 이용창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이 '우당 권동진의 생애와 민족독립운동'을, 김근수 괴산향토사연구회 고문이 '충북 괴산 출신 권동진의 친필 시문과 유허지'를 각각 발표한다.

이어 정삼철 충북학연구소장을 좌장으로 정을경(충남역사문화연구원)·오대록(독립기념관)·조혁연(충북대 사학과) 박사가 종합토론을 한다.

학술행사는 유튜브 채널(충북학연구소)에서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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