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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스파이 천국 오스트리아 변화 힘들다…"정부, 불편한 진실 외면"

등록 2022.07.06 12:2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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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보안기관 출신 첩보혐의로 체포됐지만

수십년 불편한 진실 외면해온 정부 이번에도 미적

[모스크바=AP/뉴시스]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 끝)과 러시아 가스프롬 CEO 알렉세이 밀러(오른쪽 두번째)가 2017년 4월28일 오스트리아 국영 OMV 천연가스사 CEO 라이너 젤레(왼쪽)와 모스크바 대통령궁에서 만나고 있다.

[모스크바=AP/뉴시스]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 끝)과 러시아 가스프롬 CEO 알렉세이 밀러(오른쪽 두번째)가 2017년 4월28일 오스트리아 국영 OMV 천연가스사 CEO 라이너 젤레(왼쪽)와 모스크바 대통령궁에서 만나고 있다.


[서울=뉴시스] 강영진 기자 = 오스트리아 수도 빈의 아파트 건물 3층에 경찰들이 들이닥쳐 건장한 체구의 남성을 체포했다. 오스트리아 정보기관에서 오래 근무해온 피의자가 서둘러 휴대전화를 부수려 했다.

그의 휴대전화와 노트북, USB 장치에서 찾은 데이터, 많은 서류 뭉치에서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에 미치는 강력한 영향력이 확인됐다.

에지스토 오트는 오스트리아 국내보안국 비밀요원으로 일했고 터키와 이탈리아에서 정보담당관을 지냈다. 그는 러시아에 정보를 팔고 러시아가 적으로 간주하는 서방 요원에 대한 정보를 넘겨온 혐의를 받는다.

아직 수사가 진행중인 이 사건은 유럽연합(EU) 회원국인 오스트리아의 정계와 산업계는 물론 정보당국까지 러시아가 깊이 침투해 있음을 보여준다. 오스트리아 의회는 비공개 청문회에서 러시아가 정보기관에 미친 영향은 물론 국영 천연가스 기업 OMV와 러시아간 계약도 조사하고 있다. 의회는 또 오스트리아의 고위 정치인과 정당들이 러시아 및 러시아 국영기업들과 맺은 관계도 조사중이다.

스테파니 크리스퍼 의원은 "우리 정계에 러시아가 깊이 침투하고 우리가 경제적, 정치적으로 러시아에 의존한 것이 안보 위협이라는 점이 이번에 분명해 졌다"고 말했다.

유럽 당국자들은 오트가 다른 오스트리아 정보 요원과 함께 오스트리아 외교부 안에 새 정보기구를 만들려 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외교부는 극우 자유정당 출신 카린 크나이슬이 장관이다. 이 당은 특히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2014년 러시아가 점령한 크름반도에 2017년 대표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크나이슬은 2018년 오스트리아 포도주 농장에서 올린 결혼식에 세바스티안 쿠르츠 등 유명 정치인은 물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까지 초청했다. 그는 푸틴과 왈츠를 췄고 푸틴이 손 등에 키스하는 장면의 사진도 찍었다. 크나이셀이 외교부에 정보국을 신설하는 방안을 알고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그는 "살해 위협" 때문에 오스트리아를 떠나 망명했다. 그는 비밀요원 오트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했다.

오트는 수감 3주만에 지난주 풀려났고 정직 상태로 계속 수사를 받고 있다. 그는 자신에 적용된 혐의를 모두 부인한다.

폴란드와 발트 3국 등은 푸틴 치하의 러시아를 전략적 위협으로 간주하지만 오스트리아와 같은 일부 유럽국들은 러시아가 큰 기회라고 생각한다. 2차 세계대전 뒤 연합국에 의해 분할 통치를 받은 오스트리아는 1050년 중립국이 됐다.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한 스파이 활동만 처벌하도록 한 법률과 국제원자력기구(IAEA) 등 각종 국제기구들이 자리한 때문에 스파이들의 천국이 됐다.

오스트리아는 2000년 푸틴이 부상한 것을 기회로 여겼다. 러시아 갑부들이 오스트리아에 대거 투자했다. 지난해 말 러시아 기업들의 투자액이 255억달러에 달하며 러시아의 유럽 천연가스 수출의 허브가 됐다. 오스트리아 고위 정치인들이 러시아 국영기업 임원이 되는 일도 빈번했다. 크나이슬 전 장관은 퇴임 2년 뒤 러시아 국영 에너지 기업 로스네프트의 고위 임원으로 취임해 고액 연봉을 받았다. 그는 러시아의 선전 매체인 RT에 칼럼도 썼다.

크리스티안 케른 전 총리도 러시아 철도회사 임원이었으며 볼프강 쉬셀 전 총리도 러시아 에너지 대기업 루코일의 임원이었다. 이들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직후 임원직에서 사임했다. 크나이슬은 지난 5월 로스네프트 임원직을 사임했다.

오스트리아의 주요 기업들도 러시아와 관계가 깊다. 오스트리아 국영 에너지 회사이자 오스트리아에서 2번 째로 큰 OMV사는 독일 국적 라이너 젤레를 CEO로 채용했다. 젤레는 독일 천연가스 및 정유회사인 빈터샬홀딩스 출신은 젤레는 러시아 천연가스 대기업 가즈프롬과 일했고 노르트스트림 가스파이프라인을 적극 지지했다.

지난달 OMV 감독위원회가 젤레 임기에 오스트리아가 러시아 천연가스 수입을 늘렸는지를 조사한다고 발표했다. 또 푸틴이 좋아한다는 제니트 상트 페테르부르크 축구단에 2000만달러를 후원한 혐의도 받는다. 젤레는 지난해 퇴임했다. 이 조사가 발표된 2주 뒤 가즈프롬은 오스트리아에 대한 가스 공급을 줄였다.

오트는 2017년부터 2021년까지 전직 고위 오스트리아 정보 요원인 마르틴 바이스, 독일에서 지명수배돼 러시아로 피신한 것으로 보이는 오스트리아 기업인 얀 마르살렉(42)과 협력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이스는 마르살렉을 대신해 오트에게 여러 정보를 제공했음을 시인했다. 마르살렉은 도주하기 전까지 비밀금융회사인 와이어카드의 전무였다.

독일 당국은 마르살렉과 러시아 정보기관 사이의 관계를 조사하고 있다. 또 와이어카드사가 러시아 자금을 세탁하는데 이용되거나 포르노 등을 사는데 이 회사를 이용한 사람들의 명단을 제공한 것으로 보고 조사중이다.

유럽 안보 당국은 지난 2020년 6월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오스트리아에서 벨라루스로 간 마르살렉이 한동안 러시아 정보기관이 운영하는 모스크바 아파트 단지에 거주했으며 러시아 신분증을 받았다고 밝혔다.

안보 당국자들은 오트가 지난해 체포되기 몇 년 전부터 의심을 받았지만 오스트리아 당국이 그를 기소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지난 2017년 11월22일 그는 빈국제공항에서 경찰에 붙잡힌 적이 있다. 미 중앙정보국(CIA)이 10개월전 오트가 러시아에 정보를 팔고 있다고 제보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그해 11월 다시 오트의 혐의를 통지하면서 오트가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안보회의에 참석하도록 허용한다면 미국이 불참할 것이라고 경고했었다. CIA의 이 경고는 오스트리아 디 프레세지가 보도했다.

CIA의 경고를 받은 오스트리아 당국이 오트의 아파트 수색영장을 발부받았으나 핵심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정보기관은 그에 대한 조사를 계속하길 원했으나 정부가 민간인에 대한 수사를 금지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오트를 서방 정보 자료 접근이 차단된 경찰학교로 보냈다.  

그러나 오트는 경찰학교에 근무하면서 오스트리아 국내외에 정보망을 구축했다. 다른 기관에는 자신이 새 직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유럽 전역의 인물들에 대한 비밀 정보를 수백차례에 걸쳐 불법적으로 요청했다. 그는 러시아 스파이로 기소된 한 여성이 아직도 서방 정보기관의 감시 대상인지를 영국 정보기관에 확인한 적도 있다.

또 2019년 위조 여권으로 독일에 입국한 뒤 베를린에서 체첸 야당 인사를 저격한 러시아 대외정보국(FSB) 요원 바딤 크라시코프에 사건을 폭로한 매체의 편집국장 크리스토 그로체프에 대해 2020년 조사한 것으로 나타난다. 독일 당국은 그가 러시아 FSB의 요청에 따라 그로체프의 신원을 조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로체프 국장은 "겁주려고 한 것일 수도, 납치하려는 것일 수도, 아니면 암살을 준비하면서 뒤를 밟은 것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또 오트의 휴대전화 자료에는 러시아의 베를린 작전상 실수를 지적하면서 개선점을 제시하는 내용도 있었다. 오트는 밀고자가 크라시코프의 탈출을 제보했을 수 있다면서 "제보자가 파악될 때까지 모든 작전을 즉시 중지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외국의 안보 당국자들은 오스트리아 의회 등의 조사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을 것으로 본다.

전직 미국 중앙정보국(CIA) 유럽 책임주재관 소냐 승혜 림은 "이 사건은 오스트리아 정부가 조사해 파헤쳐야 하지만 오스트리아 정부가 그러지 못할 것으로 본다"며 "40년대 50년대부터 수십년 동안 불편한 진실을 덮어왔다"고 지적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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