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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언의 책과 사람들] 냉전시대의 한국, 누더기가 된 ‘자유만세’

등록 2022.09.10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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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자유만세 (사진=한상언 영화연구소대표·영화학 박사·영화사가 제공) 2022.08.31.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자유만세 (사진=한상언 영화연구소대표·영화학 박사·영화사가 제공) 2022.08.31.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1975년 영화진흥공사 안에 필름 보관소를 만들면서 흩어진 필름들에 대한 대대적인 수집 사업을 진행했다. 이때 수집된 필름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946년 제작된 ‘자유만세’였다. 해방 후 조선영화계가 힘을 모아 만든 해방 기념영화로 한국영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영화 중 하나다. 아쉽게도 이 영화는 발견 당시 누더기에 가까운 상태였다. 조각나 버린 듯한 필름은 마치 엔지 필름을 이어붙인 것처럼 엉뚱했으며, 사운드도 망실돼 훗날 다시 녹음한 상태였다. 마지막 장면은 아예 필름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가장 오래된 한국영화 필름으로 중요한 행사 때마다 상영되는 기념비적인 영화로 인정됐으며 훗날에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나 ‘시민케인’(1941)과 같이 일반인들도 잘 알고 있는 세계영화사에 중요하게 언급되는 완성도 높은 영화들은 ‘자유만세’보다 먼저 제작됐다. 한국영화사에서 영화 잘 만들기로 정평이 난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 상태가 이렇다 보니, 대학시절 어느 교수님은 20년 앞서 제작된 ‘아리랑’(1926)은 차라리 발견되지 않는 편이 나을 수도 있겠다는  자조적인 말을 던지기도 했다.

그럼 ‘자유만세’는 원래부터 형편없는 모습의 영화였을까? 그렇지 않다면 어떤 이유로 누더기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인가?

이 영화를 자세히 살피면 특정 장면들이 의도적으로 삭제되고 다시 촬영한 필름들이 삽입돼 화면이 심하게 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특정 장면이란 월북 영화인들이 클로즈업 되는 장면들이다. 영화 초반부에 일본 경찰에 쫓기는 독립운동가가 등장하는데, 그중 한명이 배우 박학이다. 배경 위주 화면에서는 박학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지만, 일본경찰의 총에 맞아 쓰러진 박학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장면에서는 뜬금없이 다른 인물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와 같은 모습은 일본경찰 간부로 연기한 월북 영화인 독은기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도 똑같이 반복된다. 다시 말해 ‘자유만세’가 누더기가 된 이유는 월북한 배우들의 모습을 영화에서 지우기 위한 의도적인 삭제와 대체 때문이다.

1947년 여름, 남한 내 좌익활동이 금지되고 곧이어 1948년 말 월북 영화인들이 출연하거나 제작에 참여한 영화에 대해서 상영금지 조치가 시행됐다. 이러한 조치는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게 나타났는데 부산지역은 그 조치가 다른 지역보다 심했다. 그 예로 1950년 봄, 해방 전 제작된 영화가 월북 배우들이 등장한다는 이유로 상영금지 조치를 당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은 전쟁이 발발하면서 공식화 됐으며, 남한에서 영화를 상영하기 위해서는 월북 영화인의 모습을 지워야했다. 일제강점기 필름 대부분이 망실된 데에는 상영할 수 없는 위험한 영화를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부담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조선영화의 수준을 확인하게 된 것은 해방 전 제작된 온전한 상태의 필름들이 발견되면서부터다. 해방 전 영화들의 발견 후 ‘자유만세’의 모습이 원래와는 다를 수 있다는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고 그 이유는 월북 영화인에 대한 의도적인 삭제와 엉뚱한 개작 때문이라는 것이 확인됐다.

1946년 6월, 영화 개봉 전 ‘자유만세’의 시나리오가 발매됐다. 지금 남아 있는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원래 영화의 모습을 가장 정확히 보여주는 것이리라. 이 시나리오를 보며 누더기가 된 영화를 대신해 해방의 감격을 나누었던 영화의 본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극장 안 관객은 이념과 상관없이 함께 만세를 부를 정도로 감격스러워 했고, 경찰은 목청껏 소리를 지르고 황홀한 눈물을 흘리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냉전시절 이데올로기 대립이 이 영화를 누더기로 만들었다. 시나리오로만 남아 있는 온전한 ‘자유만세’를 상상하며, 한반도에도 더 이상 냉전의 상처가 덧나지 않고 새로운 살이 돋아나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한상언 영화연구소대표·영화학 박사·영화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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