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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판도라 상자

등록 2022.11.09 09: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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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판도라 상자

[서울=뉴시스] 배민욱 기자 = 신들의 왕 제우스는 자기 뜻을 거역하고 불을 훔쳐 인간에게 준 프로메테우스를 괘씸히 여겼다. 제우스는 그의 동생인 에피메테우스를 이용해 인간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했다.

제우스는 헤파이스토스에게 진흙으로 여자를 빚으라고 했다. 그 여자에게 제우스는 생명을, 아프로디테는 아름다움을, 헤르메스는 말솜씨를, 아폴론은 음악의 재능을 줬다. 헤르메스는 거짓·아첨·교활함·호기심을 채워줬다. 이 아름다운 여인의 이름은 '판도라'.

판도라를 본 에피메테우스는 첫눈에 반해 결혼했다. 제우스는 판도라를 보내면서 작은 상자 하나를 건네줬다. "절대 열어보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였다.

문득 무엇이 들어 있는지 궁금해진 판도라는 제우스의 의도대로 결국 상자를 열었다. 판도라가 상자를 열자 불행, 질병, 고통, 슬픔, 가난, 전쟁, 증오 등의 재앙이 세상으로 쏟아져 나왔다.

깜짝 놀란 판도라가 상자 뚜껑을 닫았을 때 그 안에 남은 것은 딱 하나였다. '희망'이었다. 그 이후로 인간들은 힘든 일을 많이 겪었지만 희망만은 잃지 않게 됐다.

중소·벤처기업과 소상공인의 2022년을 되돌아보면 판도라 상자가 떠오른다. 판도라 상자 속 각종 재앙처럼 이들에게 올해는 암울했다.

코로나19라는 어두운 긴 터널 속에서 아직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팬데믹(세계적 대유행)과 우크라이나 전쟁, 미국발(潑) 금리 인상 등이 연쇄 작용을 일으키면서 세계 경제에 짙은 불황의 그림자가 한국 경제를 위협했다. 고물가·고환율·고금리의 3고(高) 시대는 힘이 세지고 있다. 

위기는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한국 경제의 뿌리인 중소기업은 자금난으로 궁지에 몰렸다. 코로나19 기간에는 돈이 풀려 그나마 숨을 쉬던 기업들도 이자 부담과 자금 경색 이중고 상황에선 버티기 쉽지 않았다. 대출금리가 상승하면서 이자 부담은 가중되고 급기야 '도산'이라는 벼랑 끝에 서 있는 중소기업이 많아졌다. 

벤처·스타트업도 도산이라는 공포에 떨고 있다. 고금리와 글로벌 경기침체 장기화 등으로 얼어붙은 시장 상황이 지속되면서 스타트업계에 빨간불이 켜졌다. 금리 인상으로 인한 벤처캐피탈(VC)과 사모펀드 등 주요 투자처의 자금줄이 막히면서 스타트업계의 성장에도 제동이 걸렸다.

투자 한파는 수치로 확인된다. 중소벤처기업부(중기부)는 올해 3분기(7~9월) 벤처투자가 전년 동기 2조913억원보다 40.1% 줄어든 1조2525억원이라고 발표했다. '돈맥경화'가 심각한 상황에서 중기부의 내년 모태펀드 예산까지 줄었다. 내년 예산은 3135억원으로 올해(5200억원) 대비 40%가량 줄어든 액수다.

모태펀드 예산 축소는 벤처·스타트업계 입장에선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꼴이다. 중기부는 민간투자 확대를 강조했지만 정부가 관련 예산을 줄이는 마당에 VC들이 투자를 늘릴 수 있을지 되묻고 싶다. 투자, 성장, 회수, 재투자로 이어지는 벤처생태계 선순환구조가 시작부터 막히게 되면 벤처·스타트업계 위기는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

소상공인들은 어떤가. 사회적 거리두기 해제 소식은 가뭄 속 단비였다. 코로나19 종식에 대한 기대감도 있었다. 소비 활성화로 쌓여왔던 적자 등을 메우기 위해 심기일전했다. 하지만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정부의 손실보상과 손실보전도 소상공인들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고물가 여파로 소비가 위축되면서 소상공인들의 어려움은 더 가중됐다. 급기야 살기 위해 폐업을 선택하는 상황을 맞기도 했다.

내년에는 중소·벤처기업과 소상공인의 상황이 최소한 올해보다 나아지길 바란다. 하지만 그럴 수 있을지 걱정부터 앞선다. 3고 현상이 내년에도 이어질 것으로 전망되는 등 경제 상황이 녹록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실효성 있는 정부 정책도 얼마나 적재적소에 나오는지 지켜봐야 한다.

중소·벤처기업과 소상공인의 현재 상황이 방금 연 판도라의 상자일지라도 이것만은 기억하자. 상자를 열자마자 쏟아진 수많은 재앙과 달리 마지막까지 희망은 남아 있었다.

"마지막 상자에 남은 것은 '희망'이었다. 그 뒤로 인간들은 갖가지 불행에 시달리면서도 희망만은 고이고이 간직하게 됐다고 한다."('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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