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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한 하자보수' 요구…현대중공업 '갑의 완력'

등록 2022.12.09 14:03:05수정 2022.12.09 19:5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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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중공업, 하자 보증 책임 협력사에 미뤄"

영문 계약서에 '잠재 하자' 조항 적용해 ICC 제소

협력업체 "중소기업 망하라는 제소"라며 강력 반발

현대重 "구상권 청구는 당연한 계약서 내용" 입장

[서울=뉴시스]현대중공업과 기자재 하자보증 분쟁을 겪고 있는 발전설비 전문업체 에너지엔의 급수가열기 제품. (사진=에너지엔 제공) 2022.12.05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현대중공업과 기자재 하자보증 분쟁을 겪고 있는 발전설비 전문업체 에너지엔의 급수가열기 제품. (사진=에너지엔 제공) 2022.12.05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유희석 기자 = 현대중공업이 영국 런던 국제중재재판소(ICC)에 협력업체와 '하자 보증' 문제를 놓고 중재소송을 벌여 눈길을 끈다. 해당 협력업체가 납품한 제품에서 발생한 하자보증 문제를 놓고 양측이 팽팽히 대립하고 있다.

특히 대기업인 원청업체에 중소기업인 하청업체가 하자 보증 문제로 법적 대응을 벌이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해당 협력업체는 현대중공업이 계약상 독소조항을 악용해 하자보증 책임을 하청업체에 떠넘기는 '갑질'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현대중공업 측 주장대로 하자 보수 비용을 부담하려면 자칫 기업이 무너질 정도로 타격이 크다는 입장이다.

반면 현대중공업은 계약서에 나와 있는대로 구상권을 청구하는 것이라고 맞서고 있다.

사우디 급수가열기 '하자 보증' 기간이 갈등 원인

사건의 발단은 2013년 8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현대중공업은 사우디아라비아전력공사(SEC)가 발주한 2640㎿급 슈퀘이크화력발전소를 수주했다. 사우디 남서부 지잔시(市)에서 북쪽으로 135㎞ 떨어진 홍해 연안에 초대형 화력발전소를 건설하는 사업이다. 사업비만 33억 달러(당시 한화 3조7000억원)에 달한다.

발전소 설계부터 기자재 제작·공급, 건설, 시운전까지 전 과정을 턴키로 수주한 현대중공업은 2014년 6월 화력발전소 핵심 설비 중 하나인 급수가열기를 설치하기 위해 국내 발전설비 전문업체 에너지엔과 244억원 규모의 계약을 맺었다. 에너지엔은 이듬해 급수가열기 44기를 납품했고, 이를 바탕으로 2018년 슈퀘이크발전소가 완공됐다.

문제는 발전소를 가동한 지 3년이 흐른 지난해 발생했다. 에너지엔이 공급한 급수가열기 4기에서 균열이 생겼기 때문이다.

현대중공업은 사우디 발주처 요구로 균열이 발생한 설비를 교체했고, 교체 비용과 발전소 가동 중단 피해금액 등을 합해 총 3200만 달러(당시 350억원)를 에너지엔에 청구했다. 에너지엔이 납품한 급수가열기에서 하자가 발생했으니, 교체 비용을 책임지라는 요구였다.

하지만 급수가열기 전체 수주금액(244억원)보다 훨씬 많은 배상 요구를 받은 에너지엔은 즉각 반발했다. 계약상 하자 보증 기간은 납품일로부터 48개월로 균열이 발생하기 전에 하자 보수 기간이 만료됐다고 주장했다.

에너지엔 관계자는 "조사 결과 균열은 제품 자체가 아닌 운전상의 문제로 밝혀졌고, 현대중공업 기술진도 이를 인정했다"며 "현대중공업이 계약상 '잠재 하자(Latent defect)' 조항으로 무리한 하자보증을 요구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현대중공업 측의 배상금 규모는 중소기업의 존폐로 이어질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다"고 덧붙였다.
'무기한 하자보수' 요구…현대중공업 '갑의 완력'


 

현대중공업, ICC 제소하자 에너지엔 공정위 신고

양측 갈등은 갈수록 커지는 모양새다. 현대중공업이 지난해 10월 국제형사재판소(ICC) 중재절차를 시작하자, 에너지엔은 올해 2월 현대중공업을 공정거래위원회에 불공정거래 혐의로 신고했다.

에너지엔은 해외에서 진행하는 ICC 중재을 할 경우 과도한 비용 부담이 발생해 국내 대한상사중재원 중재를 제안했지만 현대중공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우디 SEC→현대중공업→에너지엔'으로 이어지는 계약이 영국법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에너지엔 관계자는 "현대중공업과 거래를 끊을 각오를 하고 공정위에 제소하는 등 우리가 반발하자, 현대중공업 측에선 50억원으로 배상 규모를 줄였다"며 "하지만 이 금액 역시 중소기업에게는 망하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큰 부담"이라고 말했다. 이어 "해외 사업을 하면서 협력사에 영구 하자 보증을 요구하는 곳은 업계에서 현대중공업이 유일하다"고 주장했다.

현대중공업은 이와 관련 에너지엔과의 계약에 따라 하자 보증에 따른 비용을 청구한 것이지 갑질이 아니라고 밝혔다. 분쟁 해결을 위해 한국 법원이 아닌 ICC를 찾은 이유도 사업 발주처가 해외 법인이고, 사업을 사우디에서 진행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무기한 하자보수' 요구…현대중공업 '갑의 완력'


공정위 조사 결과에 쏠리는 관심

중소기업을 상대로 한 현대중공업의 갑질 여부는 공정거래위원회가 신속히 시비를 가려줘야 한다는 관측도 나온다. 공정위는 현재 에너지엔의 신고를 접수해 해당 사건을 조사하고 있다. 공정위는 이르면 이달 안에 에너지엔 신고에 따른 조사 결과를 발표할 것으로 알려졌다.

에너지엔의 법률 대리를 맡은 윤남국 변호사는 "하자 보증 기간을 놓고 서로 모순되는 조항이 포함된 계약서는 효력을 주장할 수 없다"며 "국내 기업 간 계약을 영문으로 작성하고, 분쟁 시 해결 기관을 ICC로 하는 것은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압박하려는 수단"이라고 밝혔다. 그는 "해외 사업이라고 해도 국내 기업끼리 계약할 때 영문으로만 계약서를 작성하는 이번 사례는 극히 드문 일"이라고 덧붙였다.

이정희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는 "국내 기업 사이에서 발생한 분쟁을 ICC에서 해결하는 것은 거의 볼 수 없는 사례"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아직 공정위가 조사 중이기 때문에 현대중공업이 ICC 중재를 택한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현대중공업 입장에선 상대방이 적극 대응하기 힘든 ICC 중재가 국내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현대중공업그룹은 지난 2020년 조선업계 최초로 대표이사 직할 '동반성장실'을 신설하고, 협력사와 새로운 상생모델을 구축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당시 초대 동반성장실장을 맡은 김숙현 전 현대중공업 부사장은 "협력사의 경영 안정과 경쟁력 강화는 조선업계의 필수 요소"라며 "협력사의 어려움을 더 깊게 살펴 동반성장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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