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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판 '007'…영화와는 다른 여성 스파이들의 비밀스러운 삶

등록 2022.12.09 15:57:07수정 2022.12.09 16:4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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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T, 비밀정보국 통틀어 4명뿐인 책임자 중 3인 심층 취재

'작전 책임자', '기술 책임자', '전략 책임자' 삶 6개월 취재

런던 위치한 MI6본부, 외부와 모든 소통은 유선만 가능해


[서울=뉴시스]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지난 6개월간 영국 비밀정보국(MI6) 소속 여성 책임자 3인을 심층 취재했다 2022.12.09.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지난 6개월간 영국 비밀정보국(MI6) 소속 여성 책임자 3인을 심층 취재했다 2022.12.09.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정희준 인턴 기자 = 변장을 위해 수십 개의 가발을 돌아가면서 착용하고,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5만 파운드(약 8000만원)의 현금을 가지고 다니며, 가방 속에 언제 울릴지 모르는 수십 개의 휴대전화가 들어있다. '여자는 위협적이지 않다'는 선입견을 가진 보수적인 나라들에서 은밀하게 활약한다. 영국의 첩보기관인 비밀정보국(MI6)에 소속된 여성 스파이들의 일상이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FT)는 8일(현지시간) 지난 6개월 동안 캐시, 에이다, 레베카라고 불리는 3명의 영국 MI6의 핵심 책임자들을 심층 인터뷰했다. 자세히 묘사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비밀 정보국의 시설들은 거대하고 엄숙하며, 눈을 시리게 하는 칼바람이 끊임없이 몰아쳤다. 그 비밀정보국의 한켠에 위치한 안락의자에서, '캐시'는 자신이 어떻게 MI6를 통틀어 4명뿐인 책임자 자리에 오르게 됐는지 밝혔다.

캐시가 처음 MI6에서 일자리를 제안받았다고 밝혔을 때, 캐시의 어머니는 딸이 도대체 왜 괴상하고 낯선 일에 종사하려 하는지 타박을 줬다. 세월이 흘러, 캐시는 '영국에서 가장 강력한 스파이' 중 한 명이 됐다. MI6의 운영 책임자인 캐시는 'C'라고 불리는 MI6 국장에게 직접 정기 보고를 제출한다.

캐시는 가까운 가족 외에는 누구에게도 소속을 밝히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고 했다. 런던 중심부에 위치한 MI6 본사에 출근하면 소지한 휴대전화는 전원을 끈 채 따로 보관한다. 본사 내에는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지 않으며, 외부와의 모든 통신은 유선기기를 통해 이루어진다. 재택근무는 당연히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부동산 매매와 같은 '복잡한 계약 거래'는 캐시와 같은 MI6 근무자들에게는 '악몽'과도 같다.

30년 전 처음으로 MI6 본부로 들어섰을 때, 캐시는 본부의 도시적인 분위기에 압도됐다. 지역 억양을 쓰는 직원들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출신이었다. '빨간 벽돌로 지어진 조그마한 대학' 출신인 캐시는 자신이 정말 '스파이'로서 제대로 활동할 수 있을지 걱정했다. 캐시를 인터뷰했던 이는 "걱정 마라, 우리의 일은 영화와는 다르다. 헬리콥터에서 뛰어내리거나 총을 쏴 적을 제압할 일은 없을 거다"라고 안심시켰다. 하지만 캐시는 입사 직후 전쟁 지역에 배치돼 개인 화기를 다루는 전문적인 훈련을 받아야만 했다.
[서울=뉴시스] 캐시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위장용 가발이 배우 '파라 포셋'(사진) 스타일의 빨간색 가발이라고 밝혔다 (사진출처: ABC뉴스 영상 캡처) 2022.12.09.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캐시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위장용 가발이 배우 '파라 포셋'(사진) 스타일의 빨간색 가발이라고 밝혔다 (사진출처: ABC뉴스 영상 캡처) 2022.12.09. *재판매 및 DB 금지

캐시는 이란 무기 시스템에 대한 업무로 MI6 생활을 시작했지만, 이후 전 세계의 요원을 운영·관리하는 보직으로 발령됐다. 보직 변경 이후 캐시는 전 세계의 언어를 배우고, 낯선 문화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야 했으며, 은밀하게 국경을 넘고 위장을 통해 추적을 뿌리쳐야 했다. 캐시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가발이 1970년대 인기몰이를 했던 배우 '파라 포셋' 스타일의 빨간색 가발이라고 언급했다.

'여성 스파이'로서 해외에서 에이전트를 모집하고 관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캐시는 관계 구축을 위해 밤새 술자리를 가지기도 하고 골프를 치러 다니기도 했지만, 이내 '자신만의 방법'으로 신뢰를 형성하는 방법을 깨우쳤다고 밝혔다. 캐시는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며 관계를 형성했다.

캐시는 이러한 '여성 스파이'라는 지위가 성에 대해 보수적인 국가들에서 나름의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도 말했다. 캐시는 FT와 인터뷰에서 "남성 중심의 문화권에서, 여성들은 때때로 '덜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된다. 그들은 내가 스파이로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다. 이는 잠재적 이점이다"라고 밝혔다.

"영국인의 생명을 구한 적이 있는가"라는 FT 기자 질문에 캐시는 순간 머뭇거렸다.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인 캐시는 "나 혼자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30년 차 스파이답게, 캐시는 자신의 '업적'이 외부로 드러나는 것에 대해 매우 조심스러워했다. 캐시는 현재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을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MI6의 또 다른 여성 책임자 '에이다'는 어린 시절부터 스파이를 꿈꿨다. 에이다는 오빠로부터 선물 받은 '스파이 설명서'를 탐독했고, 피그펜 암호를 독학해 화분 아래에 친구들에게 전하는 암호를 남기기도 했다. 20대 초반에 외무부에 지원한 에이다는 즉시 'MI6에 적합한 인재'라는 평가를 받았다. 세월이 흘러 40대가 된 에이다는 MI6의 '기술 책임자'가 됐다. 그녀는 MI6 내에서 코드네임 'Q'로 알려져 있다.

에이다는 '요원'들에게 첨단 장비를 제공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테라바이트 단위의 정보를 조사해 '협력할만한 동기가 있는' '회유 목표'가 파악되면, 연극 전문가들로 구성된 팀은 목표물을 방문하기 전 MI6 요원들을 감쪽같이 변장시킨다. 변장에는 기술팀이 개발한 '스파이 장비'들이 사용된다. 에이다는 시계, 찻잔, 넥타이핀, 브로치 등의 일상적인 물건 안에 자세히 밝힐 수 없는 '첨단 기술'이 심겨 있다고 밝혔다. "최근에는 어떤 물건을 이용했는가"라는 FT 기자 질문에, 에이다는 "지금 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모든 물건과 이 방 구석구석에 배치된 모든 물건"이라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리고 아쉽게도 기밀 유지 조항에 의해 발설하거나 기사로 내보낼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결혼해 자녀를 두고 있는 에이다는 임신과 출산이 삶에 영향을 끼치긴 했지만, 그녀의 경력을 발목 잡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에이다는 '가장 협상하기 힘든' 이들과 대화를 할 때 임신을 한 채였지만, 오히려 배 속의 아이나 '다음 세대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하면서 대화를 풀어나갈 수 있었다고 전했다. 다만, 에이다는 가정과 스파이 활동을 병행하기 위해서 엄청난 심리적 중압감을 견뎌내야 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트라우마에 시달리기도 했다는 에이다는 자신이 처한 문제를 인정하는 데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지만, 이후 MI6의 지원을 통해 어느 정도 극복해낼 수 있었다고 밝혔다.
[서울=뉴시스] 런던에 위치한 MI6 본부, 외부와의 모든 소통을 유선으로 진행하며, 모든 유리가 방탄 소재이며, 충격을 흡수하는 구조로 되어있어 대전차 로켓포를 맞아도 피해를 입지 않는다 (사진출처: 나우디스 월드 뉴스 영상 캡처) 2022.12.09.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런던에 위치한 MI6 본부, 외부와의 모든 소통을 유선으로 진행하며, 모든 유리가 방탄 소재이며, 충격을 흡수하는 구조로 되어있어 대전차 로켓포를 맞아도 피해를 입지 않는다 (사진출처: 나우디스 월드 뉴스 영상 캡처) 2022.12.09. *재판매 및 DB 금지

인터뷰에 응한 세 번째 책임자인 '레베카'는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이 자신을 스파이 업계로 이끌었다고 밝혔다. 외무부에 지원한 이후 '스파이'에 지원하지 않겠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레베카는 처음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후 외무부 측 관계자는 레베카가 스파이로서 '다른 문화'를 가진 이들에 대해 배우고, 그 외국인이 '외교관'에게는 절대로 말하지 않을 것들을 캐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레베카는 관계자에게 "나 같아도 말하지 않을 것 같은데 왜 그들이 그런 걸 말하겠는가"라고 질문했다. 관계자는 "왜냐하면 그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옳은 일'을 할 사람들을 찾아서 설득하는 것은 바로 '당신'이 될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레베카는 그 답변에 매료됐고, 즉시 MI6에 합류했다.

레베카는 자신이 '스파이 영화'를 즐겨 보지 않는 이유를 '현실이 영화보다 더 흥미롭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전략팀을 맡고 있는 레베카는 국가의 행보와 지도자들의 의도에 대해 엄청난 시간을 들여 조사하고 분석하는 일련의 과정을 '퍼즐 맞추기'에 비유하며, "이 일은 정말 마법과도 같이 흥미롭다"라고 말했다.

캐시, 레베카, 에이다에 대한 인터뷰는 6개월 동안 지속됐지만, 3명의 책임자는 필요 이상의 것들을 절대로 밝히는 경우가 없었다. 얼마나 많은 테러 음모를 저지했는지, 가장 자랑스러운 작전이 무엇이었는지, 스파이로 활동하는 과정에서 어떤 심리적 고뇌와 신체적 고통을 겪었는지에 대해서, 그들은 무덤까지 그러한 모든 것들을 혼자서 끌어안고 가야 한다.

"왜 이 일을 계속하는 것이냐"라는 FT 기자 질문에, 에이다는 명찰 목걸이를 벗고는 보안 패스 뒤쪽에 꽃아둔 카드를 보였다. 카드에는 시어도어 루즈벨트 전 미국 대통령의 연설 한 구절이 적혀 있었다.

"실제로 경기장에서 뛰는 사람, 얼굴이 먼지와 땀과 피로 얼룩져 있지만 용감하게 노력하는 사람, 실수와 결점 없는 노력이 없기 때문에 실수를 거듭하는 사람, 그러나 실제로 행동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 위대한 열정과 위대한 헌신을 아는 사람…그는 최악의 경우에, 실패하더라도 적어도 용기를 가지고 크게 실패할 것이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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