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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백혜선 "나는 좌절의 스페셜리스트입니다"

등록 2023.01.30 20: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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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잉글랜드 음악원 교수…첫 에세이 출간

[서울=뉴시스]피아니스트 백혜선이 30일 서울 강남구 오드포트에서 '나는 좌절의 스페셜리스트입니다'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마스트미디어 제공) 2023.01.30.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피아니스트 백혜선이 30일 서울 강남구 오드포트에서 '나는 좌절의 스페셜리스트입니다'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마스트미디어 제공) 2023.01.30.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강진아 기자 = 1994년 모스크바의 차이콥스키 콘서트홀, 젊은 동양인 여성 피아니스트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환히 보이는 객석에서 관객들은 '네가 얼마나 하는지 보자'는 표정이었다. 그나마 대회 마지막 순서였기에 자리가 채워져 있었다. 동양인 남성 연주자가 콩쿠르 무대에 오르면 객석의 반이 남고, 동양인 여성 연주자가 나오면 반의반이 남는 시대였다. 오케스트라 단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표정은 피로하고 무관심했다.

당시 29살이었던 피아니스트 백혜선은 스승인 변화경의 말을 떠올렸다. "오늘 무대 위에서 네가 할 일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는 거야. 음악으로 마음을 움직일 수 있어." 그렇게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1위 없는 3위에 오르며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이 콩쿠르에서 한국인이 입상한 건 처음이었다.

피아니스트 백혜선(58)이 첫 에세이 '나는 좌절의 스페셜리스트입니다'를 출간했다.

그는 30일 서울 강남구 오드포트에서 열린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이 책은 자서전이 아니다"라며 "일기장에 쓴, 제 삶에 특별한 순간을 담았다"고 말했다. 코로나19를 지나며 어머니를 비롯해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내며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썼다고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네 살때 건반 앞에 앉은 후 50년이 넘도록 피아노와 인연을 맺어왔다. 서울 예원학교 2학년을 마친 후 미국으로 건너가 '건반 위의 철학자'로 불리는 러셀 셔먼과 변화경 부부의 가르침을 받았다. 1989년 윌리엄 카펠 국제 콩쿠르 우승을 시작으로 1990년 리즈 국제 피아노 콩쿠르, 1991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등에서 입상했다.

꽃길만 걸어왔을 것 같은 그의 영광의 순간 뒤엔 사실 좌절의 나날이 있었다. 백혜선은 "인생은 내 마음대로, 계획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며 "매일매일 좌절했던 삶이었다"고 돌아봤다.
[서울=뉴시스]피아니스트 백혜선이 30일 서울 강남구 오드포트에서 '나는 좌절의 스페셜리스트입니다'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마스트미디어 제공) 2023.01.30.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피아니스트 백혜선이 30일 서울 강남구 오드포트에서 '나는 좌절의 스페셜리스트입니다'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마스트미디어 제공) 2023.01.30.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어린 시절엔 수영선수를 꿈꿨다가 뛰어난 재능의 다른 선수를 보고 마음을 접었다. 피아노를 다시 만나 20대 중반 여러 콩쿠르에서 입상했지만, 만 28살에 출전한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처음으로 본선 1차 탈락이라는 쓰라린 경험을 했다. 이후 전화 회사 영업사원으로 일하며 음악을 접겠다는 마음도 먹었다. 그때 스승 변화경이 마지막으로 제안한 게 차이콥스키 콩쿠르였다.

"그때는 제 운이 거기까지라고 생각했어요. 다시는 음악을 안 할 줄 알았죠. 음악과 동떨어진 생활을 하다가 차이콥스키 콩쿠르를 계기로 다시 돌아온 거죠."

차이콥스키 콩쿠르 입상 직후엔 서울대 음대 사상 최연소 교수로 임용됐다. 하지만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10년 만인 2005년 서울대를 떠나 미국으로 다시 향했다.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녹록지는 않았다. 홀로 두 아이를 키우며 생계형 피아니스트로 부침도 겪었다.

"서울대 교수가 되면 인생의 모든 게 다 풀린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가보니 내 옷이 아니었죠. 여기에서 끝나면 절대로 안 된다는 마음속 외침이 있었어요. 외국에서 승부를 보고 싶었죠. 하지만 지방으로만 연주를 다니며 동양인 연주자로서 한계에 부딪혔고, 아이 둘을 키우는 것도 만만치 않았죠. 인생을 포기할까 생각할 정도로 크게 좌절했어요."
[서울=뉴시스]피아니스트 백혜선이 30일 서울 강남구 오드포트에서 '나는 좌절의 스페셜리스트입니다'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마스트미디어 제공) 2023.01.30.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피아니스트 백혜선이 30일 서울 강남구 오드포트에서 '나는 좌절의 스페셜리스트입니다'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마스트미디어 제공) 2023.01.30.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그는 미국 클리블랜드 음악원 교수를 거쳐 현재 모교인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제자들을 길러내며 그는 가장 먼저 시를 읽게 한다. 음악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키우기 위함이다. "어린 나이에 등수를 매기고 결과물을 중요시하게 되는데, 사실 음악은 취향이지 등수가 아니다. 그림을, 문학을 좋아하는 것과 같다"고 강조했다.

세계 무대를 활보하고 있는 피아니스트 조성진, 임윤찬, 손열음 등 젊은 연주자들의 활약도 언급했다. "10대들이 지금은 조성진, 임윤찬처럼 되고 싶어 하잖아요. 붐을 일으키고 있는데 자랑스럽기도 하고 그 힘이 놀라워요. 외국에서도 폭발적인 인기가 있죠."

반세기를 피아노와 함께해왔지만, 음악적 좌절은 여전하다고 했다. "젊은 세대들의 힘을 어떻게 따라가겠어요.(웃음) 저의 가장 큰 고민은 연주회에 오는 분들께 음악이 오래 남도록 하는 거예요. 가슴을 울리고, 상상할 수 있게 하는 거죠. 좋은 책을 읽는 것 같은 기분을 주고 싶어요."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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