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北 고려왕릉]
잊혀진 혜종의 무덤을 찾다

4회. 두 이복동생에게 밀려 단명한 고려 2대 혜종의 무덤 순릉(順陵) 순릉(順陵)은 고려 2대 군주인 혜종((惠宗·914∼945)과 의화왕후의 합장묘다. 고려사(高麗史) 945년(혜종 2년) 음력 9월 15일자 기록에는 “(혜종이) 9월 중광전(重光殿)에서 승하하자 송악산 동쪽 기슭에 장사지내고 능호(陵號)를 순릉이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후에 혜종의 왕비였던 의화왕후가 승하하자 순릉에 합장됐다. 문제는 순릉이 있는 송악산 동쪽 기슭이 어디냐 하는 점이다. 조선 성종 때 발간된 『동국여지승람』에는 “탄현문(炭峴門) 밖 경덕사(景德寺) 북쪽”에 순릉이 위치하고 있다고 기록돼 있다. 조선 선조 때 기록에 따르면 이 때까지만해도 혜종의 능은 탄현문 밖에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었다. 다만 고려 태조의 능에만 비석이 있어서 정확히 알 수 있었고, 나머지 고려 왕릉은 비석이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이마저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대다수 고려 왕릉은 무덤 주인을 알아 볼 수 없을 지경으로 방치된 것으로 보인다. -소실된 혜종 무덤 찾기 조선 말기에 이르러 고종(高宗)은 고려 왕릉의 여러 능침(陵寢)을 보수하고 정비해 75기에 대해 ‘고려 왕릉(高麗王陵)’이라고 쓴 표석을 세웠다. 이때 혜종의 순릉(順陵)은 송악산 동쪽 자락의 남안화사화사 근처에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1916년(대정 5년) 일제는 2대 혜종(惠宗)의 능이라고 전해지는 무덤을 발굴하고 다음과 같은 내용의 보고서를 남겼다. “봉분(封墳)에 병풍석(屛風石)이 없고 난간석(欄干石)의 잔석(殘石)이 남아있으며, 다른 석물(石物)은 없다. 능 앞에 정자각(丁字閣)의 초석이 남아있다.” 그런데 일제는 이 조사보고에서 ‘전 혜종 순릉(傳 惠宗 順陵)’으로 표기하여 이 무덤이 순릉이라고 확정하지 않았다. 일제가 추정한 순릉은 일본강점기 때 행정구역상으로 경기도 개성군 송도면 자하동이다. 이곳은 고려 도성(개성성)의 안쪽에 있다. 고려 왕릉이 모두 개성성 밖에 있다는 것과 배치된다. 이러한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북한은 1957년 이 능을 다시 발굴 조사했다. 그리고 ‘무덤 칸(묘실)도 없는 거짓 무덤’으로 발표했다. 고려 왕릉이라면 당연히 돌로 조성된 묘실이 발견되어야 하는데 아무 것도 없었다. 이후 북한 고고학계는 개성시 룡흥동(일본강점기 때 개풍군 영남면 용흥리) 송도 저수지 북쪽에 있는 화곡릉을 혜종의 무덤으로 지목했다. 이 능은 그때까지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의 옛 지명인 화곡이라는 이름을 붙여 ‘화곡릉’으로 불려왔다. 화곡릉은 개성시 룡흥동 소재지에서 서북쪽으로 6km 정도 떨어진 송도 저수지 북쪽 기슭의 나지막한 산 능선 중턱에 있다. 능의 서쪽에는 고려 왕릉급 무덤으로 추정되는 동구릉과 냉정동무덤군을 비롯한 많은 유적이 있고, 서남쪽에는 개성성 외성의 동북쪽문터인 탄현문터가 있다. 고려 궁궐(만월대)로부터 동북쪽으로 10km 정도 떨어진 위치다. 일부 학자는 ‘화곡릉’의 서쪽에 있는 ‘동구릉’이 혜종릉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1997년 북한 고고학계는 ‘동구릉’을 발굴했지만 타다 만 자기 조각들과 판 못 몇 개만 찾아냈을 뿐 무덤의 주인을 확정할 단서를 찾지 못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2019년 북한은 내각 민족유산보호국 산하 조선민족유산보존사와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주도로 화곡릉을 대대적으로 발굴 조사했다. 발굴 당시 화곡릉은 봉분만 남아 있고, 대부분의 석물은 땅속에 묻혀 있는 상태였다고 한다. 북한은 발굴 과정에서 ‘高麗王陵’(고려왕릉)이라고 새긴 비석과 청자 새김무늬 잔 받침대, 꽃잎무늬 막새기와 용 모양의 치미(지붕 용마루의 두 끝에 설치하는 조각 장식) 조각들을 비롯한 유물들을 찾아냈다. ‘고려왕릉’이라고 새긴 비석은 조선 시대 고종 때 세운 것으로 그동안 땅속에 묻혀 있던 것을 발굴한 것이다. 발굴 후 북한은 “무덤의 형식과 위치, 유물, 역사 기록자료들을 심의·분석한 결과 오랜 세월 비밀로만 전해오던 화곡릉의 주인이 고려 2 대왕 혜종의 무덤인 순릉이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밝혀냈다”라고 발표했다. -고려 왕릉 중 가장 작은 규모라는 통설 뒤집어 북한 고고학계가 화곡릉 발굴 후 혜종의 순릉으로 확정한 결정적 단서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연구사의 설명에 따르면 두 가지가 판단의 주요 근거인 듯하다. 하나는 지금까지 발굴된 고려왕릉 가운데 무덤 칸의 규모가 가장 크고, 무덤 칸이 반지하에 만들어진 외칸의 돌 칸 흙무덤으로 전형적인 고구려의 무덤형식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용 모양의 치미가 고려왕궁터인 만월대에서 발견된 것과 같다는 점이다. 이러한 근거에 기초해 이 무덤이 고려 건국 초기의 왕릉이라고 확정하고, 문헌상 ‘송악산 동쪽’에 묻힌 고려 초기 왕인 혜종의 무덤으로 결론을 내린 것이다. 발굴 결과 순릉은 남북 63.6m, 동서 20m 범위 안에 총 3개 구획으로 나뉘어 있다. 가장 위 구획에는 직경 13m, 높이 3m 규모의 봉분과 비석 받침돌이 있었고, 중간 구획에서는 좌우에 각각 1개의 문관상(文官像)이 땅속에서 발견됐다. 아래 구획에는 제를 지내던 정자각 터가 확인됐고, 많은 주춧돌이 발견됐다. 봉분 주위에서는 난간석들이 일부 발굴됐고, 무덤 구역 전체에 돌담(曲墻)을 쌓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순릉은 전형적인 고려 왕릉의 배치구조를 하고 있다. 다만 다른 고려 왕릉과 달리 12지신을 새긴 병풍석이 없고, 둥근 모양으로 다듬어진 화강석을 둘러놓은 원형의 기단이 확인됐다. 무덤 칸(묘실)은 크기가 길이 4m, 너비 3.4m, 높이 2.2m로, 묘실 안 중앙에 합장된 왕과 왕비의 관대가 마련돼 있고, 그 옆에 부장대가 있다. 사진상으로는 벽화가 확인되지는 않는다. 순릉에서는 남쪽으로 송도 저수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고, 멀리 개성의 진산인 송악산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북쪽으로는 오관산 영통사가, 동남쪽에는 조선 시대 명기(名妓) 황진이가 사모했다는 유학자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년~ 1546년)의 묘가 자리 잡고 있다. - 재위 2년만에 요절, 단명한 혜종 혜종은 태조 왕건의 장남이다. 어머니는 나주(羅州) 지역의 호족이었던 다련군(多憐君)의 딸인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이다. 두 사람은 왕건이 아직 궁예(弓裔) 휘하의 장수로 활약하던 때에 만나 인연을 맺었고, 912년에 아들 왕무(王武)를 낳았다. 여러 호족과 ‘정략결혼’을 통해 통합을 모색한 태조 왕건에는 20명이 넘는 아들이 있었다. 사후에 왕자 간 권력투쟁을 우려한 태조는 이른 시기에 장자를 후계자로 책봉했다. “혜종이 태어나 일곱 살이 되었을 때 태조가 그를 후계자로 세우고자 하였으나, 그의 어머니 오씨(吳氏)가 미약한 가문 출신이어서 옹립 못할까 우려한 나머지(其母吳氏側微恐不得立), 오래된 상자에 자황포( 黃袍)를 담아서 오씨에게 내려주었다. 오씨가 옷을 박술희에게 보이자 박술희가 태조의 의도를 짐작하고서 혜종을 세워 정윤(正胤)으로 삼기를 주청하였으니, 정윤은 바로 태자이다.” (『고려사』 권92열전5전5, 박술희) 혜종은 태조를 도와 후삼국의 통일에 큰 공을 세웠으나 재위 기간 기호족 세력에 억눌려 왕권이 크게 약화됐다. 특히 왕규(王規)시해 음모와, 지방 호족 세력 및 이복형제들의 도전을 제압할 만한 독자세력 기반이 없어 항상 신변에 위협을 느꼈고, 재위 2년만에 병으로 죽었다. 고려사에는 “혜종은 민(民)에게 공덕(功德)”이 있었다고 기록했으나 아주 적은 양만 남아 있는 고려 초기의 기록을 통해 볼 때 혜종에게 어떤 공덕이 있었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기록에 담긴 그의 삶은 왕위 계승 분쟁에 시달리다가 요절한 비운의 군주일 뿐이다. 혜종의 이복동생인 광종 때 외아들이 정치적 사건과 연루되어 처형됐다는 기록이 보여주듯, 혜종은 당시의 혼란한 정국 속에서 평온하게 일생을 마치지는 못한 듯하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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