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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출판업계의 산증인
현대시 대중화에 힘써

84세를 일기로 22일 별세한 '출판계 거목'인 민음사 그룹의 박맹호 회장은 한국 출판 역사에서 전환점을 만들어온 출판인으로 통한다. 한국에서 소외된 장르였던 시(詩)의 대중화에 선봉장이었고, 젊은 작가들의 적극적인 발굴을 통해 본격적인 단행본 출판 시대를 열기도 했다. 또 교재 출판 수준에 대부분 머물렀던 인문학, 자연 과학 등 기초 학문 출판을 다양한 형태로 장려했다. 특히 한국 현대시의 산파로 통한다. 1970년대만 해도 시집 류는 비인기 장르였다. 그나마 많이 읽히는 작가는 김소월, 서정주, 김영랑, 유치환 등 몇몇에 불과했다. 박 회장은 1974년 '오늘의 시인 총서'를 중심으로 한 시리즈를 기획, 출판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를 시작으로 김춘수의 '처용', 천상병의 '주막에서', 고은의 '부활', 박재삼의 '천년의 바람', 황동규 '삼남에 내리는 눈' 등 지금은 한국 시단의 거목으로 자리 잡은 젊은 시절의 작품이 '오늘의 시인 총서'를 통해 소개됐다. 민음사에서 최초로 시도한 국판 30절 판형은 이른바 '시집 판형'이라 불리게 됐다. '오늘의 시인 총서'는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로 이어지면서 시의 독자층을 확대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으며, 이후 다른 문학 출판사들의 시집 출판의 전범이 됐다. 1972년 '당시선'(고은 옮김) 등을 펴내면서 시작한 '세계시인선'도 출판계에서 높게 평가 받는다. 일본어 중역이 난무하던 기존의 출판 관행을 깨고 젊은 연구자들을 모아 원문 번역을 시도했다는 점, 1973년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를 시작으로 가로쓰기를 채택했다는 점, 당시로서는 거의 볼 수 없던 판형에 원문을 병기하고 해설과 연보를 수록했다는 점이다. 박 회장은 젊은 작가 발굴에도 크게 힘썼다. 1970년대만 해도 젊은 작가들의 작품은 판매는 고사하고 출판조차 쉽지 않았다. 주로 외국 문학이 주축을 이뤘으며 한국 문학은 김동리, 황순원 등과 같은 대가들 작품만 주로 출판하던 시기였다. 1974년에 시작한 민음사의 '오늘의 작가 총서'는 최인훈의 '광장', 이청준의 '소문의 벽', 조선작의 '영자의 전성시대' 등 젊은 작가들의 참신한 작품을 세상에 내놓아 한국 문학 읽기 붐을 일으켰다. 1976년 문학 계간지 '세계의 문학' 창간과 동시에 제정된 '오늘의 작가상'은 신인 작가를 발굴하고 그 창작을 격려하는 산실로서 문단과 사회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문열, 한수산, 조성기, 박영한, 강석경, 최승호 등 현재 한국 문단의 거목들을 세상에 선보이면서 1980년대 한국 문학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오늘의 작가상'은 21세기에도 명성을 이어 이만교의 '결혼은, 미친 짓이다', 김혜나의 '제리', 최민석의 '풍의 역사', 김기창의 '모나코' 등을 선보였다. 2015년에는 출판사와 장르 등 관습적 경계를 허물고 한 해 동안 출간된 모든 소설 중 최고의 작품을 가리는 것으로 대상을 확대했다. 2009년에는 한국 문학의 미래를 이끌어 갈 신예들의 경장편 소설을 소개하기 위해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를 기획했다.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를 비롯해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 등의 작품들은 내놓았다. 국내 최대 문학전집인 세계문학전집을 통해 해외의 문학을 국내에 소개하는 발판도 만들었다. 1995년 기획을 시작한, 이 전집은 1998년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1번으로 세상에 선보였다. "세대마다 문학의 고전은 새로 번역돼야 한다"라는 발간 취지로, 원문 번역에 충실한 완역의 기조 아래 국내 최초로 외국 작가들과 정식 계약을 체결해다. 권위자들의 번역을 통해 한국 출판계에 대한 국제적인 신뢰를 끌어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귄터 그라스, 응구기 와 시옹오 등 다양한 국가의 거장들과 제3세계 거장, 여성 작가 작품 등을 적극적으로 반영해 현대 문학의 스펙트럼을 한눈에 볼 수 있게끔 했다. 2017년 1월 현재 346번 출간을 기록했다. 모던 클래식 시리즈를 통해서는 오르한 파묵, 코맥 매카시, 요시모토 바나나 등 동시대 거장의 작가들을 비롯해 무라카미 하루키, 조너선 사프란 포어 등 장르와 유형을 가리지 않고 대중성과 문학성을 동시에 자랑하는 대중소설들을 선보였다. '대우학술총서', '현대사상의 모험', '박홍규 전집', '민음 생각 시리즈' 등 인문, 학술 출판의 저변을 넓힌 점도 높게 평가 받고 있다. 1983년 대우재단과 함께 한 '대우학술총서'는 특히 인문, 사회과학 및 자연과학, 연구 번역 등 순수 학술 출판을 위한 방대한 기획으로 주목 받았다. 자유와 양심의 시인이자 한국 문단의 모더니즘을 개척한 김수영을 기려온 것도 박 회장의 업적이다. '김수영 전집'(시·산문)을 출간하고, '김수영 문학상'을 제정했다. 이 상은 이후 김광규, 이성복, 황지우, 최승호, 장정일, 장석남 등의 수상자를 배출하며 본격적인 '시(詩)의 시대'를 개척하는 데 공헌했다. 2009년에는 '김수영 육필시고 전집'을 출간, 기존의 원고뿐 아니라 초고에서 시상 메모까지 현존하는 354편의 육필 시 원고를 모두 담은 새로운 정본을 마련했다. 다양한 자회사 설립으로, 아동 추리, 판타지 등 새로운 문학 영역을 개척한 점도 높게 평가 받았다. 1933년 12월31일 충북 보은군 보은읍 비룡소에서 태어난 박 회장이 1994년 자신의 고향 이름 을 따 설립한 비룡소가 시작이다. 아동 출판물의 새로운 장을 연 것으로 평가 받는 비룡소는 '이무기가 날아오른 못'이라는 뜻이다. 이어 1996년 자회사인 '황금가지' 설립과 함께 출판의 영역을 확장하여 추리, 판타지 등 새로운 문학 영역을 개척했다. 또 1997년에는 과학도서 전문 출판사 '사이언스북스'를 설립했다. 2005년에는 황금나침반, 세미콜론, 민음인 등을 차례로 세상에 선보이면서 종합 출판 그룹으로 거듭났다. 현재는 판미동, 반비, 고릴라박스 등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 몇차례 정부의 권력과 불화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95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소설 '자유 풍속'을 응모했으나 자유당 정부를 신랄하게 풍자한 내용이 문제가 돼 탈락하기도 한 박 회장은 1989년 6월 서울지방국세청이 특별 세무 사찰을 시작해 한 달 만에 추징세액 1억원을 통보받기도 했다. 좌파 출판인들과 합세해 대한출판협회 접수를 기도했다는 혐의로 진행한 치밀한 계획이었다고 당시 청와대 인사가 증언하기도 했다. 같은 해 10월 서울지방국세청 국정감사장에서 당시 민주당 김덕룡 의원이 "정부와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 왔던 출판사에 대한 문공부의 출판 탄압에 국세청이 앞장선 것 아니냐"라고 질타하기도 했다. 2015년에는 손녀인 박윤하가 SBS TV 'K팝 스타4'에 출연, 박 회장의 이름이 젊은 층에 알려지기도 했다. realpaper7@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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