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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8월26일 소련군 사령관 평양 입성·시가 행진

3. 소련군의 평양 입성 해방 당일 여운형, 안재홍의 주도로 조직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일시적으로 국제 세력이 우리를 지배할 것이나, 그것은 우리의 민주주의적 요구를 도와줄지언정 방해치는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그들은 연합국이 진주할 것은 예견했지만 미국과 소련이 서로 다른 정책과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 미국과 소련은 해방 다음 날인 8월 16일 38선을 경계로 한반도 분할에 합의했다. 그리고 일본군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한반도에 들어온 후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정부 수립을 위해 각축전을 벌였다. 소련군이 한발 앞서 한반도에 발을 내디뎠다. 1945년 7월, 스탈린그라드전투를 승리로 이끈 소련군의 ‘영웅’ 알렉산드르 바실리예프스키 원수가 소련군 극동 최고사령관에 임명된다. 일본 관동군을 격퇴하고 만주와 한반도를 해방하는 게 그의 임무였다. 소련 극동군은 158만 명의 대군으로 서쪽의 만몽(滿蒙) 국경에 말리노프스키 원수를 사령관으로 하는 자바이칼 방면 군을, 북동쪽의 소만(蘇滿)국경에 막심 푸르카예프 대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제2극동군방면군을, 동쪽의 연해주지방에 키릴 메레츠코프 원수를 사령관으로 하는 제1극동방면군을 각각 전개해 세 방면에서 만주의 관동군을 포위했다. 여기에 태평양함대가 합동작전에 참여했다. 제1방면군의 임무는 연해주 남단에서 소만국경을 넘어 동만주지역의 요새들을 파괴한 후 지린(吉林)을 공격함으로써 관동군을 양분시키고, 만주의 심장인 창춘(長春)을 공략한다는 것이었다. 제1방면군 부대 중 최남단을 담당한 것이 이반 치스차코프 사령관이 지휘하는 제25군이었다. 미국이 8월 6일과 8월 8일 두 번에 걸쳐 원자폭탄을 일본에 투하하자, 소련은 서둘러 일본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다. 이른바 소련군의 ‘8월 폭풍 작전’이 개시된 것이다. 소련 제1극동방면군은 만주의 일본 관동군을 공격하고, 8월 9일에는 한반도의 북쪽 끝에 도착했다. 개전과 동시에 소련군은 500여 대에 달하는 대규모 전투기, 폭격기들을 출동시켜 나진, 웅기, 청진 일대에 대한 대대적인 공습을 실시해 일본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 8월 11일에는 소련 태평양함대 소속의 해군부대가 웅기에 상륙하고, 다음날에는 나진항에 상륙하는데 성공했다. 이 때 한반도에 가장 가까운 미군 부대는 일본의 남쪽 섬 오키나와(沖縄)에 도착해 있었다. 소련군 제25군이 청진을 함락한 것은 8월 18일이었다. 두만강을 건넌 소련군의 진격이 의외로 지지부진했던 이유는 그만큼 함경도의 방어를 맡고 있던 일본군 제34군의 저항이 예상 외로 완강했던 탓이었다. 8월 19일 관동군은 마침내 항복했다. 이후 소련군은 파죽지세로 원산과 함흥에 진출했다. 8월 24일 함흥에 비행기로 도착한 치스차코프 사령관은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첫 연설을 했고, 이날 소련군은 포고문을 발표했다. 소련군의 도착 소식이 미리 알려졌는지 치스차코프 사령관 일행을 환영하기 위해 갓 쓴 노인부터 맨발의 아이들까지 많은 인파가 몰려나왔다. 소련군은 일본군 제34군의 무장 해제를 하고, 함경남도의 행정권을 접수하자 바로 조선민족 함경남도 집행위원회에 넘겨줬다. 이 단체는 8월 16일 함흥 형무소에서 석방된 정치범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함경남도공산주의자협의회와 건국준비위원회 함경남도 지부가 통합해 조직됐다. 8월 26일 마침내 치스차코프 사령관이 평양에 입성했다. 소련군은 지프에 나눠 타고 평양 시민의 환영을 받으며 중심가를 행진했다. 그리고 약식이나마 평양공설운동장에서 ‘환영대회’를 가졌다. 이날 밤 치스차코프 사령관은 평양 철도호텔에서 후루카와 가네히데(古川兼秀) 평안남도지사와 만나 항복 절차를 밟았고,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 조만식(曺晩植) 위원장과 현준혁(玄俊爀) 조선공산당 평남지구 위원장을 만나 행정권 이양에 합의했다. 8월 27일에는 소련군 제25군의 한 부대가 한중 국경 도시이자 교통의 요지인 신의주에 입성했다. 소련군은 8월 23일 개성을, 25일에는 해주에 도착했고, 9월 4일에는 동두천까지 진출했지만, 곧 38선 이북으로 철수했다. 이로써 소련군의 38선 이북지역 진주는 종료됐다. 이북 지역에 주둔한 소련군은 제25군 산하 6개 사단 및 1개 기갑 여단 등 12만 5000명과 해공군 3만 명을 합하여 약 15만 명에 달했다.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소련군의 손실은 전사 1446명, 부상자 3119명 등 4717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소련군 제25군에는 교도소에 수감된 죄수들을 석방해 간단한 훈련만 시켜 징발한 군인들이 다수 있을 정도로 군기가 약했고, 만주와 북한지역 진주 초기에는 온갖 약탈과 행패를 벌여 주민들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 소련군 범죄가 늘어나자 9월 6일 무렵 소련 주둔군 사령부의 포고가 나오고, 만행을 저지른 일부 병사들에 대한 공개 총살이 이뤄지면서 소련군 병사들의 비행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통상 소군정이라고 부르지만, 당시 공식 명칭은 민정(민간 정부)이라고 불렀다. 소련은 종전 후 독일 같은 추축국 본토에만 군정이란 말을 썼고, 폴란드, 북한 등 추축국에 점령됐다 해방한 지역에서는 민정이란 말을 공식 사용했다. 소련군은 민정이란 말에 걸맞게 함흥이나 평양에 진주해서 시행했듯이 형식적으로나마 행정권을 조선인의 자치조직에 넘겼다. 하지만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이 연해주군관구와 25군 사령관에게 하달한 명령서에 따르면 북한지역 민간행정에 대한 지도는 연해주군관구 군사평의회에서 수행했다. 이 군사평의회의 실질적인 책임자는 티렌티 스티코프 중장이었다. 평양에 상주한 25군 군사위원 니콜라이 레베데프는 뒷날 증언에서 “스티코프가 조선에 있건 연해주군관구에 있건 또는 모스크바에 있건 간에 그의 참여 없이 38선 이북 조선에서 이뤄진 조치란 하나도 없었다”라고 회고했다. 소련군은 북한지역 진주 후 소련의 정책을 반대하는 세력의 약화 내지 제거, 지지 세력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 각종 지원과 선전을 통한 조선인의 지지 및 실질적인 이익 획득 등 소련의 정책 관철에 힘썼다. 소련은 드러내 놓고 통치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원하는 정책 목표를 철저하게 관철하려 하였던 점은 분명하다. 소련 극동군에 배속된 종군 기자들은 소련군이 만주와 한반도에 진주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촬영해 남겼다. 그중 일부 사진을 선별해 만든 사진첩이 소련 극동군의 고위장성들에게 기념으로 전달됐지만, 국내에 소개된 사진은 대단히 한정돼 있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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