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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 신작 '노래처럼 말해줘'로 다시 호흡 박정자·이충걸
성별·나이
뛰어넘은 우정

"그래요. 물론 울기도 하지요. 당신을 위해서 울어요. 이 일을 위해서 울어요. 아름다운 석양이나 갈매기 때문에 울지요. 남자가 형제를 괴롭힐 때···, 그가 후회하며 용서를 빌 때···, 용서를 받지 못했을 때···, 그리고 용서를 받았을 때···, 나는 울어요." 최근 삼성동에서 만난 남성잡지 GQ 편집장 출신 이충걸 작가가 연극 '해롤드 & 모드'의 해롤드의 대사를 거침없이 외워나갔다. '해롤드'가 '모드'의 집에 찾아가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 콜린 히긴스의 소설 '해롤드와 모드'(1971)가 원작인 이 연극은 죽음과 자살에 대해 고민하는 19세 청년 해롤드와 죽음을 앞둔 80세 할머니 모드의 세대를 초월한 순수한 사랑과 우정을 그렸다. 국내에서 2003년 연극 '19 그리고 80'이라는 이름으로 첫 선을 보인 뒤 꾸준히 무대에 올랐으며 배우 박정자(78)의 대표작 중 하나다. 이 작가는 과거에 자신들이 자주 가던 압구정 카페 2층에서 박정자와 이 연극 대본을 함께 낭독하던 기억을 떠올렸다. 카페는 사라졌지만 그 때 감성은 이 작가와 박정자의 대사에 영원히 구금된 것 같았다. "체구가 크지만 불안정하고 정형화되지 않은 해롤드의 캐릭터가 저와 흡사하다고 생각해요. 선생님과 함께 출연하고 싶다고 했는데 농담처럼 받아들이시더라고요. 카페에서 대본을 읽었을 뿐인데 눈물 흘리던 모습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이충걸 작가) 박정자는 "배우는 자신의 감정을 절제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 때는 그렇지 못했다"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느새 실제 모드랑 나이가 엇비슷해진 박정자는 도인 같은 얼굴로 말했다.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이 작가가 박정자를 칭송하면 이를 박정자가 부인했다. 서로 성격, 성향이 완전히 다르다고 입을 모았는데, 그런 차이점이 오히려 폭풍 시너지를 냈다. 두 사람은 성별과 나이를 뛰어넘는 우정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살아있는 표본'이다. 올해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지 30주년이 되는 해. 1990년 1월 이 작가가 '행복이 가득한 집'에서 막 피처 에디터를 시작한 때에 인연을 맺었다. 박정자는 이 작가의 첫 인터뷰이였다. 인터뷰를 위해 당시 보러 간 연극 '굿나잇 마더'는 이 작가에게 벼락과도 같았다. 이 작가는 당시에 이미 연극계에 이름을 떨치던 박정자의 인터뷰를 위해 질문만 60개 넘게 준비해갔다. 그는 "궁금한 부분도 있었지만 '위대한 연극배우'를 만나러 가는데 당연했다"고 말했다. 이 작가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박정자는 "난 위대한 연극배우가 아니다"라고 단호히 선을 그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연극배우' 등의 수식은 결국 부질없어요. 앞으로는 그런 표현을 쓰지 말았으면 해요. 저는 제 시간을 살아낼 뿐이에요. 무슨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작가는 "'박정자가 위대한 배우'라는 사실은 팩트다. 선생님이 대한민국에서 차지하는 분량은 지나칠 수 없다"고 했다. 사실 모든 인연은 운명과 같다. 이 작가는 박정자를 처음 대면하기 전 연극 '굿나잇 마더'를 보지 못할 뻔했다고 떠올렸다. 당시는 비오는 금요일이었고 이 작가는 동숭아트센터 앞에 서 있었다. "연극 티켓값이 8000원이었어요. 저는 그 때 연극을 제대로 볼 때도 아니어서, 티켓값이 얼마인지도 몰랐죠. 제 주머니에는 5000원밖에 없었고 비까지 내리고 있었죠. 그런데 참 매표소 직원 분도 특별했어요. 못 본 척 할 수도 있었는데 '누구 기다리세요?'라고 물으시더라고요. '돈이 없다'고 솔직하게 말씀 드렸더니 '5000원만 내고 들어가세요'라고 하시더라고요." 박정자는 "인연이라는 것은 우연"이라며 미소지었다. 이 작가는 박정자를 처음 대면하던 극장의 분위기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살짝 추웠는데 청색 재킷을 입고 전깃줄에 앉아 떨고 있는 새처럼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고요한 목소리에도 아우라가 나왔죠.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아름다운 언어에서 풍기는 태도가 무척 마음에 들었고 여러 가지 질문을 했어요. 당시 제가 잘할 수 있는 베스트라서 마음에 들었어요." 박정자는 배우로서나 인간적으로나 자신을 다시 알아봐 준 이충걸이 믿음직스러웠다. 1994년 박정자가 출연한 모노드라마 '11월의 왈츠' 대본을 이 작가가 쓰게 된 것이다. 숭고하게 느껴지는 '작가'라는 타이틀이 자신에게 여전히 부담이라는 이 작가는 '11월의 왈츠'를 쓸 때는 그 부담이 더 막중했다. "선생님께서 어느날 '너의 이야기를 나의 이야기인 듯 써라'라고 말씀하셨어요. 희곡 쓰는 트레이닝이 전혀 안 돼 있었기 때문에 진솔하게 써내려갔죠. 선생님의 가치에 기대지 않았으면 쓰기조자 힘들었을 거예요. 공연은 매진사례였죠." 이 작가는 이후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내 사랑 히로시마' 등 박정자가 출연한 연극의 극본을 썼다. 자신의 오랜 친구라고 이 작가를 소개한 박정자는 그만큼 자신을 잘 아는 이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제 '나쁜 부분'을 포함해 스스로 모르는 것들에 대해 속속들이 더 잘 알고 있다"고 했다. 공연 기획·제작사 뮤직웰이 다음달 6~16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선보이는 박정자의 배우론을 담은 연극 '노래처럼 말해줘'의 대본을 이 작가가 쓰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노래처럼 말해줘'는 60년 가까이 연극만을 생각해온 박정자가 무대 뒤 삶의 이야기까지 꺼내놓는 자리다. 박정자의 내레이션과 음악, 영상이 어우러지는 크로스오버 공연이다. 연극은 박정자의 무대 60년 역사를 작품 연대기 또는 극중 인물로 엮는다. 음악을 따라 공연이 전개되며 박정자는 작품 속의 인물로 발언한다. 딸이 사랑하는 남자를 차지하려고 그 남자를 우물에 가두어 죽여버린 엄마, 카페에서 노래하는 늙은 창녀, 남편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총으로 쏴 죽인 아내, 아기를 낳자마자 탯줄로 목을 졸라 죽인 아그네스 수녀의 비밀을 끈질기게 싸고도는 원장수녀 등이다. 1962년 이화여대 문리대 연극반 시절 '페드라'로 데뷔한 박정자는 지금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쉼 없이 연극무대에 섰다. '키 큰 세 여자', '나는 너다', '햄릿', '오이디푸스', '피의 결혼', '위기의 여자', '신의 아그네스',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등이 대표작이다. 박정자는 "누워 있는 활자를 살려내는 것이 배우"라고 했다. 실제 설득력 넘치는 음성으로 내는 단단한 발음들의 언어가 그녀 입에서 흘러나올 때 캐릭터는 실존 같은 존재감을 얻고 연극은 생명력이 넘쳐 흐른다. 그런데 정작 박정자는 자신에게 언어의 민감성이 부족하다고 몸을 낮춘다. "책방이나 레코드점에 많이 가지 못했어요. 그런 곳에 많이 가서 책도 읽고 음악도 듣고 싶었는데 말이죠." 반면 이 작가는 "서점과 음반점에 많이 가는 삶을 살아왔는데 가끔 배우로서 무대 위에 서 있는 꿈을 꾼다"며 눈을 반짝거렸다. "서로 경험하지 못한 것을 희망한다”는 것이다. “최근 꿈을 꿨어요. 관객 입장 시간 5분 전인데 대사를 다 외우지 못한 거 있죠. 하하." 박정자의 배우론이 이어진다. "순간의 몰입은 원칙이지만 자신의 감정대로만 하는 경우 신파로 전락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과거 자신이 출연한 안톤 체홉의 단막극 '백조의 노래'에서 맡았던 늙은 배우 바실리 바실리치 스비예틀로비도프의 대사를 떠올렸다. "관객에게 난 쓰레기"라며 분노하는 부분이다. "이제 내 노래는 끝났다"고 한탄하는 역인데 이 부분에서도 노골적인 감정표현으로 수위를 넘어서면 안 된다고 했다. 반면 언어가 주는 아름다움에 도취하게 만드는 배우가 박정자라고 특기한 이 작가 역시 미문으로 유명하다. 그가 GQ 편집장 재직 시절 쓴 '에디터스 레터'는 매번 소설 같은 유려한 문체로 장편(長篇)이 아닌 손바닥 장(掌)자를 써 장편(掌篇)으로 불리기도 했다. 최근 출간된 이 작가의 에세이집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우리의 특별함'(은행나무)은 이 에디터스 레터를 묶은 것이다. 표지 그림인 남아프리카 작가 클로데트 스뢰더르스의 '보이(Boy)'는 감성적이면서도 총명한 이 작가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 이 작가는 '노래처럼 말해줘'에서 "박정자의 입을 빌어서 굉장히 미묘하고 비범하게 언어를 발음하는 법을 발견해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제가 쓴 글들을 선생님의 입을 빌어 무대에서 들려주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행운이에요. 어느 누가 당대를 호령한 배우와 이렇게 작업을 할 수 있을까요." 이번 작품에서는 총 6곡의 노래가 라이브로 연주된다. 영화 '페드라' OST '사랑의 테마', 박정자 독집 음반 '아직은 마흔네살'의 타이틀곡 '검은 옷 빨간 장미', '낭만에 대하여' 등이 연주 리스트에 포함된다. 박정자는 노래실력도 뛰어나다. 이충걸은 "한국사람 중에 박정자 선생님처럼 비브라토(목소리를 떨리게 하는 기교)를 내는 사람은 없어요. 마치 에디트 피아프처럼 노래하신다"고 예를 들었다. 그런데 박정자는 최근 하는 연습에 대해 "너무 불안해서 노래가 잘 안 된다"고 털어놓았다. "제가 가수는 아니니까 잘 하지 않아도 되니 노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연기도 목에 힘 줄 일도 아니고 제가 정직하게 살아온 만큼 정직하게 보여드리면 되죠. 저는 무대 위에서 너스레나 애드리브가 되지 않는 사람이에요. 갈수록 저를 내려놓으려고 해요. 이를 악물고 핏대 세우는 일은 더 의미가 없어요. 자연스러움이 진정한 자유죠." 최근 영화 '조커'에 삽입된 '어릿광대를 보내주오'(Send in the clowns)가 공연의 대미를 장식하는데 이 노래를 지금 자신의 삶을 표현할 수 있는 대표곡으로 정한 이유다. 이 작가는 현재 자신의 삶을 표현할 수 있는 노래를 묻는 같은 질문에 엘라 피츠제럴드의 '셉템버 송'을 꼽았다. 이 작가는 지구의 모든 노래 중에 가장 아름다운 곡 중 하나라고 했다. '에디터스 레터'에 옛날의 시가 내포한 감정이 어떤 것인지 느낄 수 있다고 소개한 곡이다. "9월뿐만 아니라 모든 날들을 축소한 노래라 소중한 날 소중한 순간을 위해 들어야 할 곡"이라고 했다. 박정자의 음성과 이충걸의 글은 기우제가 비를 부르는 것처럼, 막 움튼 봄의 노래를 호출한다. 곧 말하듯 노래하는 순간들이 만발한다. 마지막으로 '박정자'라는 타이틀로 이 작가가 '에디터스 레터'에 썼던 글을 붙인다. "박정자가 나의 '첫 번째' 인터뷰이였다는 것은 나에게 금속 벨트에 끼인 듯한 숙명성을 줬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까지 내 인생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친구가 됐다. 그동안 박정자를 만난 시간을 표현할 길이 없다. 불그스름한 다이너마이트 껍데기로 삶 전체를 덮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한편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며 활동중인 재즈 피아니스트 허대욱이 음악감독 겸 피아노 연주자로 함께 무대에 오른다. 허대욱을 비롯해 내로라하는 창작진이 뭉쳤다. 박정자와 오래 호흡을 맞춰온 '11월의 왈츠'의 작가이자 남성잡지 'GQ' 편집장 출신 이충걸, '프루프' '버자이너 모놀로그'의 연출 이유리, 뮤지컬 '스위니토드' '레베카'의 무대 디자이너 정승호, 연극 '메디아'를 작업한 의상 디자이너 진태옥 등 '드림팀'이 구성됐다.

뉴시스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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